제48회 학술문예상 학술논문 우수작
제48회 학술문예상 학술논문 우수작
  • 허진(사학 4)
  • 승인 2024.11.26 01: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임진왜란으로 보는 금산사(金山寺)의 장소성

 

  1. 머리말

  ‘숭유억불’, 조선시대 불교 정책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이와 같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유교 사회였다. 전 왕조의 국교였던 불교는 양반 사대부층이 주류가 된 조선 사회에서 배제되었다.1) 연산군과 중종 때는 공식적인 폐불이 진행되었다. 이는 불교의 존재를 부정하고 승려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었고, 공인되지 못한 불교는 법제의 밖에서 스스로를 보전하여야 했다.2) 그러나 500년간 고려에서 큰 영향력을 끼치던 불교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건 불가능했고 조선에서도 억불 정책 속에서 여전히 종교적 역할을 하며 그 맥을 유지했다. 어린 명종을 대신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시기 불교중흥정책이 잠시 시행되며 양종과 승과가 부활하지만, 곧 다시 폐지되고 만다.3)

  이번 주제인 ‘금산사’는 『금산사사적』의 기록이 신빙성이 떨어짐을 참작하여4) 창건 시기를 통일신라 경덕왕(742~765)대로 보아도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이다. 그리고 그만큼 다양한 사건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후백제의 수도인 완산주(현 전주)의 남쪽에 있던 금산사는 견훤이 유폐되었던 기록이 남아 있는 사찰이다. 그러나 1330년대 원 간섭기 고승 해원(海圓)이 금산사에 머물렀다는 기록 이후 금산사에 대한 여말선초의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 초에는 탄압의 주요지로 그 사세가 기울기도 하며5),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는 뇌묵 처영(雷黙處英)의 주도하에 의승병이 창의했던 곳이자, 광해군 대에는 연못 저주 사건으로 금산사의 승려가 국문을 당하기도 한다.

  이번 주제연구는 금산사에서 벌어졌던 수많은 사건 중 임진왜란 시기를 중심으로 다뤄보고자 한다. 임진왜란 시기 의승군에 관한 기록과 전라도에서 벌어진 전투 기록 등으로 금산사가 전쟁 중 어떤 장소성을 가졌을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본론에서 이야기하겠지만 금산사는 임진왜란 의승군이 모였던 주진사(駐鎭寺)6) 중 하나였던 곳이다. 조사 결과 선행 연구들에서는 이에 대해 금산사뿐만 아니라 승병들이 머물거나 창의했던 주진사에 관한 연구 혹은 기록 아카이빙(Archiving)이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다. 그 외 주제와 연관된 선행 연구는 인물 중심 혹은 불교 계율에 어긋나는 살상 행위와 호국불교에 관한 연구가 주를 이뤘다. 이번에는 인물이나 종교보다는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지정학적으로 금산사가 어떤 장소로 존재했을지를 중심으로 다루며 금산사 외에도 많은 사찰과 지역의 장소성이 가진 폭넓은 연구 가능성에 대한 여지와 잠재적 가치를 남기고자 한다.

  1) 우리역사넷, ‘억불정책과 폐불’. 2023.08.14.
  2) 위의 글.
  3) 그러나 이 시기 승과 급제했던 이들이 이후 왜란의 의승군을 이끄는 세력으로 성장한다.
  4) 『금산사사적』에 따르면 백제 제29대 법왕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켰다고 한다.
  5)
태종실록 권10, 태종 5년(1405) 11월 21일, “時, 金山寺住持道澄, 奸其寺婢姜庄、姜德兄弟, 土田所出、奴婢貢貨, 竝皆私用;”, “이때에 금산사(金山寺) 주지(住持) 도징(道澄)이 그 절[寺]의 종[婢] 강장(姜庄)·강덕(姜德) 형제(兄弟)를 간통하고, 토전(土田)의 소출(所出)과 노비(奴婢)의 공화(貢貨)를 모두 다 사용(私用)하였으며,”

 

  2. 의승군과 금산사

  임진왜란7)이 일어난 것은 1592년 4월 13일(양 5.24)이다.8) 14일 부산에 상륙한 왜군 제1진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1555-1600) 군은 부산진성과 다대포진성을 거쳐 15일에는 부산의 중심부 동래성 함락에 성공한다. 이후 빠르게 북상해 한양 5월 2일 한양에 입성한다.

  서울에 집결한 왜군들은 추첨으로 조선팔도를 나누어 장악키로 하여, 평안도는 고니시 유키나가, 함경도는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1562-1611), 경상도는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1553-1625), 전라도는 고바야가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 1533-1597), 강원도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 황해도는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1568-1623), 충청도는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1561-1624), 서울에는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 1572-1655)군이 주둔하여 총지휘를 하기로 하였다.9)

  의승군은 의병 중 승려들로 조직된 군을 말한다. 의병을 크게 나누어 유림의병(儒林義兵)과 승려의병(僧侶義兵)으로 나눈다면,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전자를 흔히 의병, 소수 정예인 후자를 의승군으로 나누어 부른다.10) 의승군의 규모가 본격적으로 켜지기 시작한 건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약 3개월 후 승통을 설치하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선조가 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11)을 만나 의승군 활동을 권하면서다.

 

  승통(僧統)을 설치하여 승군(僧軍)을 모집하였다. 행조(行朝)에서 묘향산(妙香山)의 옛 승관(僧官) 휴정(休靜)을 불러 그로 하여금 중을 모집하여 군사를 만들도록 하였다. 휴정이 여러 절에서 불러 모아 수천여 명을 얻었는데 제자 의엄(義嚴)을 총섭(總攝)으로 삼아 그들을 거느리게 하고 원수(元帥)에게 예속시켜 성원(聲援)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격문(檄文)을 보내어 제자인 관동(關東)의 유정(惟政)과 호남(湖南)의 처영(處英)을 장수로 삼아 각기 본도에서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수천 명을 얻었다.12)

-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1592), 7월 1일

 

  6) 駐 머무를 주, 鎭 진압할 진, 寺 절 사로 임진왜란 당시 승장들이 승병들을 모아 머물고 주둔하던 주요 사찰을 의미한다.
  7) 1592년 임진년에 발생한 1차 침입을 임진왜란, 1597년 정유년에 발생한 2차 침입을 정유재란이라 부르지만, ‘임진왜란’이라 하면 정유재란까지 포함해 총 7년간의 전란을 말한다,
  8) 양은용, 「뇌묵 처영(雷黙處英)의 의승 활동과 금산사(金山寺)」, 『한국종교 47, 2020, p.125.
  9) 양은용, 앞의 글, p.127.
  10) 양은용, 앞의 글, p.123.
  11) 휴정은 1552년(명종 7)에 문정왕후에 의해 일시적으로 부활했던 승과(僧科)에 합격해 선교양종판사 (禪敎兩宗判事)가 된 인물이다.
  12)
선조수정실록 권26, 선조 25년(1592) 7월 1일, “置僧統, 募僧軍. 行朝招香山舊僧官休靜, 使募僧爲兵. 靜招聚諸寺, 得數千餘人, 以弟子義嚴爲摠攝, 領屬元帥爲聲援. 又檄弟子關東惟政、湖南處英爲將, 各從本道起, 亦得數千人.”


 
  아울러 거국적인 단위의 의승군과는 별도로 전라좌수영 산하에 의승수군(義僧水軍)이 있어, 이순신이 이끈 수군전력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13)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기 전 4월 30일 서북 지역으로 피난 갔던 선조는 6월 11일 의주에 이른다. 그곳에서 앞선 기록처럼 휴정과 접견한다. 선조는 휴정의 제자인 기허 영규(騎虛靈圭, ?-1552)가 의승군을 조직해 활동하고 있음을 전하며 승군 활동을 권한 걸로 보인다. 이때 그의 나이 73세로 고령의 나이었는데, 선조의 물음에 아래와 같이 답한다.

 

  국내 승려 중 늙고 병들어 소임을 맡을 수 없는 자들은 이미 신(臣)이 명하여 자기가 있는 곳에서 향을 사르고 수행함으로써 신(神)의 도움을 기도하게 하였으며 그 나머지는 신이 모두 소집해 와 싸움터에 나가고자 합니다. 신 등은 비록 속세를 떠난 무리이오나 국내에 태어나 성상의 은혜와 훈육을 받았사오니 어찌 한번 죽는 것을 아끼겠습니까. 충성과 적심(赤心)을 바치고자 하나이다. 14)

 

  이때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라는 직첩을 받은 그는 전국 사찰에 궐기문을 띄운다. 이런 배경 속에서 휴정의 제자였던 금산사의 뇌묵 처영(雷黙處英, ?-1592-1593-?)은 호남 지역의 대표 의승장이 된 것으로 보인다.

 

뇌묵대사. 사(師)의 휘는 처영이니 묘년(妙年)에 금산사 법상종(法相宗) 문하에 투(投)하야 득도(得度)하였다. 후에 서산 휴정선사에 참(參)하야 조계(曹溪)의 선지(禪旨)를 전수하였다. 임진지역(壬辰之役)에 사는 당사(當寺) 금산사에서 승병 천명을 모집하야 거의부전(擧義赴戰)함으로 정부에서는 사로써 총섭(摠攝)을 명하고 후에 그 공로를 보상하여 국일도대선사부종수교보광현랑뇌묵(國一道大禪師扶宗樹敎葆光玄朗雷黙)의 법호를 사(賜)하였다.15)

 

금산사에서 승도들을 이끌고 창의했다는 것은 금산사가 의승군이 주둔했던 주진사(駐鎭寺)였음을 뜻하며, 호남 지역에 있어서 그 위상을 말해준다.16)

  13) 양은용, 앞의 글, p.128.
  14) 가쓰라기 스에하루, 『조선금석총람』下, 1923, p.854. “曰. 國內緇徒之老病不任行伍者. 臣令在地焚修. 以祈神助. 其餘臣皆統率. 悉赴軍前. 以效忠赤.”, 조기룡, 「청허 휴정과 의승군의 활동과 역할에 대한 재조명」,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69, 2016, p.396에서 재인용.
  15)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금산사지』, 아세아문화사. 1983, pp.122~123.
  16) 양은용, 앞의 글, p.138.

  임진왜란 당시 승장에 관해 정리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은데, 생략된 인물들까지 하면 총 56명의 승장이 현재 기록 발굴과 연구 등에 의해 알려졌다. 이렇게 승장들을 정리해 보면, 이 밖에도 많은 사례가 있었을 것임이 드러난다.18) 휴정이 머물던 묘향산에서는 휴정의 휘하에 있던 의엄이 총섭(總攝)이 되었으며 한강을 중심으로 북쪽은 금강산의 유정, 남쪽에는 모악산의 처영을 각각 관동 승장과 호남 승장으로 삼았다. 의엄, 유정, 처영 외에도 표에 있는 이들 대부분 휴정의 법사들이다. 그 외에도 많은 승장이 휴정의 법사(法嗣)19)로 그의 궐기문에 응했음을 알 수 있다.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의 법사도 있긴 하지만 선수 또한 휴정의 사제(師弟)로 같은 스승 아래서 수련한 이다.

  「뇌묵 처영(雷處英)의 의승활동과 그 공적」에 대해 연구한 김상영은 처영이 금산사에서 의승 1,000명을 모아 궐기했다는 기록이 오직 『금산사지』에서만 전해진다고 한다. 여타 자료에서는 처영이 ‘호남’, 또는 ‘지리산’에서 의승을 일으켰다는 내용만 전하고 있다.20) 그러나 처영과 관련해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까지 알 수 있는 그의 행적으로 보자면 금산사가 주진사였을 확률이 높을 걸로 보인다. 임진왜란의 후반기라고 일컫는 정유재란 시기 히데요시의 침략 1차 목표가 호남지역 장악이었기에 피해가 이전보다 극심했는데, 이때 금산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이 전소하여 많은 기록이 소실됐다. 이로 인해 확실한 사료가 남지 않아 주진사에 관해 확신할 수는 없으나 현재 지도와 동여도 속 지도를 비교해보며 이동 동선을 상상해보고자 한다.

  그는 궐기 후 금산사에서 북서쪽이자 충청도에서 금산을 넘어 전주로 넘어오는 길목인 이치(梨峙)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했다. 만약 그가 지리산에서 궐기하여 전투지로 출발했다면 산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사찰(지리산 주지사21))로 출발지를 설정해도 이치 전투지까지 차로 12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금산사지』의 기록이 근거가 부족해 실제 의승이 1,000명이 되지 않았더라도 최소 수백 명이 넘는 승군을 이끌고 이동했다는 건 현실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단순히 이동만 해야 하는 게 아닌 많은 인원을 통솔하며 수십 일을 이동해야 하며 왜군의 진격 상황 등에 대한 군사적 보고도 일절 없이 진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금산사에서 이치까지는 80km다. 가는 길에는 전라감영이 있으며 전주부 북쪽에는 앞서 일부 승장들의 출신 사찰인 조계산 송광사가 있다. 약 45km를 걸어서 이동하는데 12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걸 감안하면 6월 중순에 전달된 휴정의 궐기문으로 모든 승군이 모여 7월 1일에는 이미 집결이 끝나있었으며 7~8월에는 충남 금산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 처영과 의승군이 참전했다면 지리산 지역보다는 금산사가 주진사로서 설득력이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림 1>과 <그림 2>를 보면 더 확실하게 지형을 파악하며 이동 동선에 대해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림1> 현재 구글 지도 속 금산사, 전주부, 송광사, 이치 (직접 구글 지도 캡쳐 후 편집)


  17) 양은용, 앞의 글, pp.130~132.
  18) 양은용, 앞의 글, p.132. (직접 구글 지도 캡처 후 편집)
  19) 불교 용어로 스승의 법통(法統)을 이어받은 후계자를 의미.
  20) 김상영, 「뇌묵 처영(雷處英)의 의승활동과 그 공적」, 『선학 60, 2021, p.32.
  21) 지리산에서도 북쪽으로 그나마 충남 금산과 가까운 지역이다.

  <그림 2> 『동여도』 속 금산사, 전주부, 송광사, 이치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그림 1> 가장 아래 남원시와 실상사는 지리산 산맥에서 가장 북쪽 지역이다. 사실상 산맥의 가장자리, 경계 지역으로도 볼 수 있다. 지리산’, ‘호남 지역’이라는 단순한 타 기록 내 서술에서 먼저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끝, 소백산맥의 최남단에 있는 산이다. 경상남도 하동, 함양, 산청고 전라도 구례, 남원 등 넓은 지역에 걸쳐있는 산으로 하나의 산보다는 거대한 산맥에 가까운 산으로 볼 수 있다. 그만큼 사찰도 많으며 <그림 3>에서 승장들의 출신 사찰 깃발이 몰려있는 지역도 지리산의 서쪽 지역이다. 앞서 언급했듯 이동 동선을 예상했을 때 지리산보다는 금산사가 당시 상황에서 효율적이었을 걸로 볼 수 있다.

 

<그림 3> 승장들의 연고 사찰과 주요 궐기 지역, 대표 전공지
(구글 지도 캡처 후 편집)

  <그림 3>는 임진왜란 초반 대표 의승장들이 공을 세웠던 일부 전투를 표시했다. 앞서 표에 있는 이들이 모두 승장이긴 하나 해당 표에 기록된 연고 사찰은 선행 연구자가 여러 기록 중에서 출가·득도·주석 등 여러 형태의 하나를 선택한 것이므로, 임진왜란 당시 56명 승장이 모두 표에 기록된 연고 사찰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휴정, 의엄, 유정, 처영의 경우 앞선 대표 승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기록에서 그들은 연고 사찰을 주진사로 삼아 의승군을 모았음을 예상할 수 있다. 네 명의 승장 외 나머지 승장들도 연고 사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고 가정했을 때 표에 나온 56인 의승장의 궐기 지역을 지도에 표시해보면 우측과 같다.

  <그림 3> 속 의승장들의 연고 사찰을 보면 묘향산과 금강산, 황해도 중화 지역 외에는 전부 호남지방에 모여있지만, 이는 앞선 선행 연구에서 발굴한 승장들의 기록만 가지고 썼기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의승군은 인근 사찰들의 승려들이 주진사로 결집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도에 표시되지 않은 사찰이 많을 걸로 예상된다.

 

  3. 전라도 일대 전투와 금산사

  1) 지도로 보는 전투

  조선에 상륙한 일본은 빠르게 수도를 정복하는걸 우선으로 삼았다. 그래서 임진왜란 발발 직후 전라도는 왜군의 직접적 공격 목표에서는 벗어나 있었다.22) <그림 3> 속 지도를 보면 일본군은 ④에 해당하는 동래로의 남쪽, 동래성을 무너뜨린 뒤 그 길을 따라 한양으로 빠르게 진군했을 걸로 예상된다. 5월 2일 일본이 한양을 함락하고 평안도, 함경도,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전라도 등 전국 각지로 군을 나눴다.

 

<그림 4> 조선시대 9대로 지도
(경희대 지리학과 옛길도보답사 국토대장정단)

  정부가 승통을 세워 승군을 모집하기 전 처음으로 의승군을 일으킨 이는 앞서 언급했듯 휴정의 법사 영규였는데, 의병장 고경명, 조헌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고 이후 금산전투에서 왜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며 전사한다.23) 청주성수복과 금산전투는 관군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의병과 의승병이 연합해 이뤄낸 성과로 호서지방의 방어와 호남으로 통하는 <그림 4> 조선시대 9대로 지도 적의 진격로를 차단했다는 (경희대 지리학과 옛길도보답사 국토대장정단) 점에서 전략적 의의를 갖는다.24) 이후 93년 1월, 4차 평양성 전투에서는 명군과 관군에 의승군 휴정과 유정이 가세하며 평양성을 수복하고 왜군이 한양으로 물러나게 만들면서 전쟁의 흐름을 바꾼다.

  22) 하태규,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동향과 호남방어」, 『한일관계사연구 26, 2007, p.150.
  23) 1592년 7~8월에 전개된 일이며 8월 18일 새벽 최후의 전투 후 참전 의병전멸. 왜군 또한 피해가 막심해 시체를 태우는 데 3일이 걸렸다고 한다.
  24) 박재광, 「임진왜란 초기 의승군의 활동과 사명당」, 『동국사학 42, 2006, p.68.

 

  왜군이 한양을 점령하면서 1592년 6월 말부터는 본격적으로 전라도를 함락하려는 왜군과의 전투가 벌어진다. 선행 연구자료 조사를 통해 크게 안덕원 전투, 웅치·이치전투, 금산전투 등이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전투 기록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웅치전투(7/8)
▶ 안덕원전투(7/9일경)
  = 이치전투(7/9)권율·처영
  = 1차 금산전투(7/9~7/10)

▶ 청주성 전투 및 수복(8/1)영규
▶ 이치전투(8/17일경)
= 2차 금산전투(8/18) 영규 전사
▶ 독산성 전투(12/11일경)권율·처영

  이치전투의 경우 사전에는 7/9일로 기재되어 있고 선행 연구에서는 이 날짜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이 존재한다. 이에 대해서는 길게 다루지 않겠으나 이런 와중에 바로 근처인 금산에서도 같은 시기에 전투가 있었기에 자료들을 보면 2차 금산전투 (구글 지도 캡처 후 편집) 를 이치전투라 칭하기도 한다. 결국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전주 바로 초입인 안덕원, 웅치 그리고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넘어오는 길목의 지역인 금산과 이치 크게 두 곳에서 벌어진 걸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처영은 권율(權慄, 1537-1599)이 이끄는 관군과 합세하여 금산 배고개(梨峙)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1593년 2월의 행주대첩에서 승병 700여명을 이끌고 역시 권율군과 더불어 왜군 3만 명을 무너뜨리는 대승을 거둔다. 25)

<그림 5>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일대 전투
(구글 지도 캡처 후 편집)

  <그림 5> 지도를 보자면 금산사는 전투지들의 후방에 있는 걸 볼 수 있다.26) 충청도 쪽에서 내려오거나 경상도 부근에서 현재 구미 쪽을 거쳐 동쪽에서 넘어오더라도 지도 속 웅치나 이치를 지나야 하기에 전주나 아예 남쪽 지역인 진주와 남원이 뚫리지 않는 이상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이다. 실제로 이후 정유재란에서 전라도 점령을 1차 목표로 세운 히데요시는 한양을 점령한 후 남하했던 임진왜란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진주와 남원을 점령한 뒤 북상한다.

  웅치전투 이후 금산성에서 수세에 몰려있던 왜군은 이치공격이 실패한 후 금산성에 머무르면서 전라도와 충청도의 관군과 의병의 공격을 받으며 버티다가 전황이 바뀌면서 9월 17일 경상도로 철수하게 된다.27)

25) 양은용, 앞의 글, p.141.
26) 금산사가 있는 지역의 장소성을 이번 연구에서는 해전(海戰)을 다루지 않았다.

 

2) 일대 지형과 위치

  금산사는 호남정맥이 지나는 서쪽 부근 모악산에 위치한다. 북쪽으로는 금강이, 동쪽으로는 소백산맥이 각각 호서지방(충청도)과 영남지방(경상도)의 경계를 이룬다. 호남지방은 동쪽에서부터 산맥이 내려오는 동고서저의 지형이며, 노령산맥이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를 형성한다. 또한 노령을 통하여 예로부터 남북 교류가 이루어졌다. 하천은 남쪽에 영산강이 흐르고 북쪽에 만경강28)과 동진강29)이 흘러, 하천 유역에 전남평야와 호남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평야가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30)

<그림 6> 『호남지도』 속 전주부와 금산사

 

<그림 7> 『대동여지도』 속 전주와 금산사 일대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27) 하태규, 앞의 글, p.175.
  28) 대둔산 부근에서 물줄기가 시작되어 전주시 북쪽을 관통해 군산시 남쪽으로 흘러가는 물길이다.
  29) 김제와 부안 사이를 흐른 강이다.
  30)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호남지방(湖南地方).

<그림 8> 『동여도』 속 전라북도 지역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금산사는 전주와 김제를 잇는 모악산에 있다. 지도를 보면 산맥에서도 내륙 쪽에 있으며 전주의 서남쪽에 위치한다. 고지도(古地圖)의 경우 지도에 따라 금산사의 위치와 전주 중심의 거리가 조금씩 다르지만 『대동여지도』와 『동여도』의 경우 가장 현재와 흡사하게 묘사되어있다. 특히 일부 지도에는 금산사가 아닌 금산사의 말사31)가 표시된 경우도 있는데 귀신사(歸信寺), 원등사(遠燈寺) 등 다양하며 이 밖에도 인근에 있는 사찰들이 거의 금산사의 말사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찰들이 많다.

  <그림 8>을 보면 빨간 원이 모악산과 금산사다. 겉의 연두색으로 표시된 테두리는 인근 산맥을 표시한 것으로, 금산사가 위치한 모악산은 산맥 중에서도 김제와 전주 내륙으로 뻗어 있다. 이는 곧 서쪽 평야에서 가는 게 아닌 이상 여러 산맥을 넘어야 금산사로 갈 수 있음을 의미하며 특히 조선에서는 주로 해남로라 불리는 대로를 따라 완주, 전주를 거쳐야 했다.

  31) 본사(本寺)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본사에서 갈려 나온 절.

<그림 9> 허련의 『금산사도』, 19세기
(전북대학교 박물관 소장, 모악산 금산사 홈페이지)

  금산사는 들어가는 길목에는 주로 사찰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일주문이 먼저 보이는 게 아닌 개화문(開和門)이 보인다. 허련의 『금산사도』 속에서도 개화문으로 추정되는 성문이 보인다. 현재 개화문은 최근 복원된 모습이고 이전에는 6.25 전쟁으로 인해 성문의 형태만 남아있었으며 ‘견훤성문’이라 전해졌다고 한다. 허련이 『금산사도』를 그리던 시기에 석성이 지금의 복원 형태처럼 존재했다면 그림 속 모습이었을 것이다. 추정이긴 하나 금산사를 가는 길에 개화문과 같은 석성은 ‘견훤성문’이라 전해지는 석성 하나였기에 사실상 개화문의 원형이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허련의 그림 속 가람배치는 현재와 다른 부분이 존재하는데, 복원과 증축을 반복하며 변형된 부분도 있으나 대장전의 경우 이유는 모르겠으나 1922년 그림 속 위치에서 현재 미륵전의 건너편으로 이전 했다. 지금 금산사는 미륵전과 대적광전 앞으로 굉장히 넓은 공간이 있는데 대장전을 옮기기 전에도 여전히 넓었을 걸로 예상된다. 보제루는 정면 9칸, 측면 3칸의 목조 건물로 조선시대 누각인 만세루(萬歲樓)를 계승한 건물이라 전해진다. 조선시대 사찰에서 누각 건물이 번성한 이유 중 하나로 임진왜란이 꼽히는데, 전쟁 이후에는 넓은 공간을 이용해 법회나 강설 등이 이뤄지는 장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래는 외침 시 승병이 조직되고 의승군이 사찰에서 조직됨에 따라 결집 장소로서 군사적 필요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실용적 기능보다는 가람의 한 구성 요소로서 자리 잡았다.32)

32) 향토문화전자대전, ‘금산사 보제루’.

 

  4. 숭유억불에서 호국불교까지

  앞서 서론에서 조선의 불교 시책은 ‘숭유억불’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특정 시기 불교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 인식을 단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33) 조선의 주요 집권층의 세계관과 통치체제 기반은 유학이었으며 고려의 국가통치 이념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는 불교에 대한 탄압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백성들의 삶 속에서는 여전히 불교를 비롯한 다양한 신앙들이 존재했지만 말이다.

  임진왜란 이전, 불교에 대한 사회의 전반적 인식은 문정왕후의 선교양종 복립추진에 대한 사대부들의 반발에서 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34) 아래는 홍문관 부제학 경혼이 올린 상소다.

 

  이단 중에서도 불교[佛氏]의 해가 더욱 커서 예로부터 성왕(聖王)들이 비록 몹시 싫어하여 통렬히 배척했지만 오히려 금할 수 없는 것을 근심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추종하여 형세를 확대시키는 것이겠습니까? 아버지도 임금도 없는 [無父無君] 교리와 놀고먹는 무리들은 강상(綱常)을 없애며 부세(賦稅)를 도피하니 유학[吾道]과 백성을 해치는 큰 좀입니다.35)

명종실록 권10, 명종 5년(1550), 12월 18일

 

  이때 446회에 달하는 배불상소가 빗발쳤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당시 지배층의 불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많은 유학자가 불교를 아비와 임금도 없는, 놀고먹는 무리라며 배척했으나 선교양종을 위한 문정왕후의 의지는 쉽게 꺾이지 않았다. 하지만 1563년에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선교양종은 다시 폐지되고 일시적인 불교중흥은 그 종말을 맞게 되었다.36)

  그리고 왜란의 발발은 불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과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존재라는 시선에 대한 변화의 기점이 된다. 선행 연구에서는 의승군이 자발적 결성인가, 조정의 명령이었는가에 대한 논의도 있으나 당시 군역을 지는 일반 백성들조차도 근왕병으로 차출되어 싸우러 가는 도중 도망을 가는 상황이었다. 조정의 명으로 결집 되었다 하더라도 조정에서 승통을 설치했을 때는 이미 앞선 글처럼 의승군들을 의병, 관군들과 적극적으로 합심하여 전투에 참전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자발성은 이미 증명된 걸로 볼 수 있다. 특히 선왕 대에 선교양종이 폐지되었기에 승려들을 불러낼 제도적 장치도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의승군들은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전했으며 직접적인 전투 외에도 군량수송, 성곽축조 등 후방 지원까지 전방위적으로 활동했다. 그리고 애초에 군역의 대상이 아니었던 승려들이 자발적으로 참전한 행위는 근왕병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확인시켜주는 상징적 행위이자 불교가 유교의 근본사상을 위배하지 않음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37)

  한 국가에 사는 개인이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침략한 적을 살생했다는 점에서 호국(護國) 행위이나 의승군 입장에서는 최고 금계(禁戒)인 불살생계(不殺生戒)를 범한 일이기도 하다. 호국불교는 종교적 이상과 현실 간의 모순이 충돌하는 종교인의 행위이자 이를 뜻하는 단어였던 거다. 이에 대해 선조 또한 고민한 흔적이 존재하는데 다음과 같다.

33) 조기룡, 「청허 휴정과 의승군의 활동과 역할에 대한 재조명」,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69, 2016, p..
34) 조기룡, 앞의 글, p.411.
35) 명종실록 권10, 명종 5년(1550) 12월 18일, “伏以異端之中, 佛氏之害尤大, 自昔聖王, 雖深惡痛絶之, 猶患其不能禁也. 況又從而張大之乎? 無父無君之敎, 遊手遊食之徒, 滅綱常逃賦稅, 爲吾道吾民之巨蠧.”
36) 조기룡, 앞의 글, p.412.
37) 조기룡, 앞의 글, p.413.

 

만약 나라 안에서 부처님 법을 배운 무리를 병사로 만들어 검술을 배우고 활쏘기를 배워서 변고가 날 장소에서 종사하게 한다면 끓는 가마솥이나 화롯불 속이라 할지라도 회피하는 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을 보면 몸을 보전하려하고 처자를 보호하려 하는 병사에 비하여 용기와 강하기가 백배는 될 것이다. 그러하니 정말로 위급한 일이 있을 때는 족히 믿고 쓸 수 있으나, 이 법을 한번 실행하면 관음보살이 어느 곳에 있을지 심히 걱정이다.38)

 

  1595년 유정이 승려들이 산성 수호를 할 수 있게 둔전을 경작하게 하고 병법을 익히도록 하자는 상소문을 올렸을 때 선조의 답변이다. 왕마저도 이러한 괴리를 고민할 정도였다면, 상소를 한 유정을 포함한 당시 승려들 역시도 현실 충족과 이상 실현 사이에서 갈등을 하였을 것이다.39) 유정은 의승군을 일으키면서도 “우리들이 편히 노닐며 마시고 먹는 것은 모두 성상의 은혜 덕분이다. 지금 나라가 위태로운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앉아서 보기만 하고 구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40) 라고 말하며 수백 명의 의승군을 모았다고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승장이었던 유정이 승려도 한 국가의 백성이자 왕의 신하로서 충(忠)의 국가관을 지니고 있었던 걸 엿볼 수 있다.

  결국 의승군들은 전쟁이라는 현실적 문제와 불교의 최고 계율을 어긴다는 불교적 이념 사이에서 호국을 통해 터전을 지켜냈다. 불교가 살생을 피할 수 없는 전란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면서까지 입증하고 싶었던 것은 불교가 유학과 다르지 않은 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것이었다.41) 그리고 이는 실제 유학자들의 인식변화를 가져오는데, 영조 대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낸 송인명의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저 송운[유정]이 배운 바가 무엇이던가. 우리 유학자가 임금과 어버이를 버리고 윤리를 배반한다고 비난하던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매우 빠른 순간에 마음에 새겨 소매를 떨치고 의리를 일으켜 위급하고 어려운 때에 칼을 무릅쓰고 절개를 온전히 하였으니 임금에게 충성하고 윤리에 신실함이 이와 같았다. 이것은 타고난 천성[秉彝]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지만, 본래 그렇기를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러함을 얻은 것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진심진성(眞心眞性)이다.42)

 

그리고 그 이전 숙종 때 승려들은 호적에 등재되면서 온전히 백성으로 인정받게 된다. 승려의 호적 등재는 배불(排佛) 기조의 조선사회에서 국역도 부담하지 않고 놀고먹는 존재로 치부되던 승려들이 국가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았음을 의미한다.43)

38) 송운대사분충서난록, 「을미상소언사」 권2, “如使海內學佛之徒, 盡化爲兵, 學劒學射, 而從事於待變之場, 則鑊湯爐炭, 無所回避. 其視全軀保妻子之兵, 勇强百倍. 誠爲緩急, 足恃之用, 而第未知, 此法一行, 觀音菩薩, 在甚麽處.”
39) 조기룡, 위의 글, p.407.
40) 송운대사분충서난록, 「밀양표충사송운대사사명당명병서」 부록2, ““旣而慷慨語諸僧曰, 吾等優游飮啄, 皆聖恩也. 今國危至此, 坐視不救可乎. 乃募衆至數百, 亟赴順安.”
41) 조기룡, 위의 글, p.414.
42) 송운대사분충서난록, 「표충사난록발」 부록, “而彼松雲所學何事也. 豈非吾儒所詆以棄君親背倫常者也. 而顧於蒼卒之間, 投袂起義, 危難之際, 冒刃全節, 其忠於君, 而篤於倫如此. 此其秉彝之所同 得自有不期然而然者 佛氏所謂眞心眞性.”
43) 조기룡, 위의 글, p.416.

 

  5. 맺음말

임진왜란은 조선시대 시기 구분에 있어서 전기와 후기의 중간 기점으로 여겨질 만큼 거대한 전쟁이었다. 고려시대 원과의 전쟁 이후 백성들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또다시 들고 일어났던 시기기도 했다. 거시적 관점에서 각 왕실이 강화도로, 의주로 피난 갔다는 점은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도 존재한다. 다양한 측면에서 다른 점이 존재하나 그중 하나는 불교다. 고려는 불교 아래 하나의 마음으로 팔만대장경을 만들며 오랑캐를 물리치기를 빌었으나 조선은 탄압당하던 승려들이 의승군으로서 참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연구는 임진왜란 시기 3대 의승장이라 불리는 뇌묵 처영의 출신 사찰인 금산사와 그 일대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전투를 살펴보며 금산사의 장소성에 대해 주제연구를 해보았다. 이를 통해 첫째, 금산사가 주진사로서 처영이 승군을 창의했다는 기록은 『금산사지』 한 곳에 남아 있으나 그 외 기록들에 남아 있는 장소와 비교했을 때 실제 금산사가 주진사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추론을 해보았다. 둘째, 인근에서 벌어졌던 전투를 지도상에 표시했을 때 금산사는 전주 남쪽에 있어 후방으로 역할 할 수 있으며, 호남평야 바로 앞에 있는 산이었다. 즉, 왜군이 전라도로 남하 시 지정학적으로 전방에서도 후방에 자리한 요충지로 볼 수 있었다. 셋째, 금
산사는 가람배치가 둥글게 모여 산에 둘러싸인 형태로 중심이 크게 트여있다. 또한, 사찰로 들어가는 길에는 석성이 있는데 허련의 『금산사도』를 보아 조선시대부터 존재했으며 임진왜란 시기에 있었다면 하나의 산성 같은 형태로 금산사 자체가 하나의 요새처럼 기능할 수 있었을걸로 본다. 넷째, 의승군의 활동으로 인한 임진왜란 이후의 불교에 대한 우호적 인식변화는 충과 의에 있어서 유불불이(儒佛不二)를 인정하고 있는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紓難錄)』과 승려를 호적에 등재하도록 윤허한 『숙종실록(肅宗實錄)』을 통하여 확인하였다.44)

  그리고 자료조사 과정에서 의승군과 관련한 자료가 한정적으로 발굴되어있다는 점을 알게되었다. 처영의 경우 휴정, 유정과 함께 구국삼화상(救國三和尙)으로 추존되어 두륜산 표충사45)와 묘향산 수충사에 배향되었으나 기록과 연구가 많지 않았다. 연구는 대부분 개인의 전쟁 참여와 그 의의를 중심으로 다루고 있었다. 그리고 승장들은 대부분 청허 휴정의 제자들로 출신 사찰이 다양했으며 아마 금산사 외에도 여러 사찰이 주진사로서 전시 상황에서 기능했을 걸로 예상되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전라도 일대 전투를 조사하며 일부 헷갈리는 자료들이 존재했다. 전주와 금산을 잇는 길목이 이치, 즉 배고개다 보니 이치전투를 금산전투라고 서술하거나 그 반대로 서술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실제로 같은 시기에 금산에서 실제 1차 금산전투라 일컬어지는 전투가 있었으며 기록상 이후 왜군 경계를 위해 이치로 이동했다는 기록도 존재하여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당시 전투가 게릴라전으로 벌어지기도 하며 한 곳에서 수개월 동안 여러 번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를 많은 이들이 각자 기록하는 과정에서 명칭이 섞인 게 연구 과정에서 혼란을 일으킨 걸로 보인다.

  본 연구는 임진왜란 당시 전북 지역의 사찰인 금산사의 주진사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을 지도를 중심으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인물 중심적 자료와 한정적인 발굴 기록, 전투 기록의 혼동으로 인한 자료 해석의 어려움, 전쟁 시 사찰의 기능에 관한 연구자료 부족으로 인해 분석의 한계가 존재한다. 앞으로는 이를 보완하고 의승군의 활동과 각 사찰의 역할을 더 폭넓게 조명하는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44) 조기룡, 앞의 글, p.393.
45) 전라남도 해남군 대흥사에 있는 사당.

 

  <참고문헌>
  [원전 사료]
  「태종실록」
  「명종실록」
  「선조실록」
  「선조수정실록」
  「숙종실록」
  「대동여지도」
  「호남지도」
  「동여도」
  「금산사사적」
  『송운대사분충서난록』

  [연구논저]
  고영섭, 「조선후기 승군제도의 불교사적 의미」, 『한국사상과 문화 72, 2014.
  김응철, 「조선시대 배불정책과 호국불교 사례연구」, 『불교학리뷰 31, 2022.
  김상영, 「뇌묵 처영(雷處英)의 의승활동과 그 공적」, 『선학 60, 2021.
  박재광, 「임진왜란 초기 의승군의 활동과 사명당」, 『동국사학 42, 2006.
  양은용, 「뇌묵 처영(雷黙處英)의 의승 활동과 금산사(金山寺)」, 『한국종교 47, 2020.
  조기룡, 「청허 휴정과 의승군의 활동과 역할에 대한 재조명」, 『원불교사상과종교문화 69, 2016.
  정병삼, 「조선시대의 호남불교 연구의 성과와 전망」, 『불교학보 59, 2011.
  하태규, 「임진왜란 초기 전라도 관군의 동향과 호남방어」, 『한일관계사연구 26, 2007.
  황인규, 「조선시대 금산사의 역사적 전개와 사격」, 『불교학보 73, 2015.
  황인규, 「임진왜란 의승군의 봉기와 전란의 충격」, 『한국불교사연구 2, 2013.

  [저서]
  가쓰라기 스에하루, 『조선금석총람』下, 조선총독부, 1923.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금산사지』, 아세아문화사. 1983.

  [인터넷 검색]
  우리역사넷, ‘억불정책과 폐불’,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m/view.do?levelId=km_011_0060_0010_0010, 2023.08.14.
  우리역사넷, ‘휴정(서산대사)’,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313900&code=kc_age_30, 2023.8.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병’,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232#section-2, 2023.08.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처영(處英)’,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5712, 2023.08.15.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호남지방(湖南地方)’,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3706, 2023.08.16.
  두산백과, ‘법상종’,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0942&docId=1100938&categoryId=31572, 2023.08.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상종’,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670, 2023.08.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가종’,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1219, 2023.08.19.

  [사진 및 참고자료]
  <그림 1>, <그림 3>, <그림 5> 구글지도 https://www.google.co.kr/maps/?hl=ko&entry=ttu, 2023.08.30.
  <그림 2>, <그림 6>, <그림 7>, <그림 8> 규장각원문검색서비스, https://kyudb.snu.ac.kr/, 2023.08.30.
  <그림 9> 모악산 금산사 홈페이지, https://www.geumsansa.org/37 , 2023.08.30.

 

  <제48회 학술문예상 학술논문 우수작 수상소감>

  저는 사학과 사회학을 전공하는 인문학도입니다. 전공 특성상 논문을 쓸 일이 많았는데 어느덧 4년간 각 전공에서 쓴 논문만 도합 열 편이 다 되어갑니다. 그중 이번 논문은 연구 과정이 손에 꼽을 정도로 재미있었는데요. ‘절’이라는 공간은 흔히 종교적인 의미로 이해되지만, 저는 이 연구에서 임진왜란 당시 군인이 된 승려 ‘의승군’과 금산사의 역할을 조명해 보며 새로운 지점을 짚어보고자 했습니다.

  논문을 쓰며 제게 큰 울림을 준 문장은 “Done is better than perfect(완벽한 것보다는 완성한 게 더 낫다)”라는 말이었습니다. 논문은 완벽하게 하고자 하면 끝내기가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그래서 완벽해지고자 하는 욕심을 덜어내고 글을 완성한 뒤 이후 부족했던 점은 다음 논문을 쓸 때 보완하고자 했습니다. 저는 논문을 쓸 때 기초 자료조사를 하며 정말 궁금하고 흥미로운 주제를 찾아 탐구하고자 했는데요. 논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은 걸 알지만, 오히려 주어진 기한 안에 논문을 완성하고 이를 남들 앞에서 발표해 보며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찾아내는 과정에서 논문의 매력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과정은 저의 대학 생활에서 가장 ‘대학’다운 공부를 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쉽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확실히 쓰면 쓸수록 한 단계 더 성장하는 자신을 볼 수 있어 뿌듯한 경험이었습니다.

  졸업 전 좋은 기억을 만들고 갈 수 있게 해주신 덕성여대신문사와 우리대학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백년둥이로 입학해 코로나19로 인해 학교에 다닌 건 2년밖에 되지 않는데요. 주어진 시간 안에 많은 걸 경험해 보고 졸업하겠다는 의욕이 컸는데 덕분에 기분 좋게 대학 생활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도봉구 삼양로144길 33 덕성여자대학교 도서관 402호 덕성여대신문사
  • 대표전화 : 02-901-8551, 8558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수아
  • 법인명 : 덕성여자대학교
  • 제호 : 덕성여대신문
  • 발행인 : 김건희
  • 주간 : 임양규
  • 편집인 : 윤수아
  • 메일 : press@duksung.ac.kr
  • 덕성여대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덕성여대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press@duksung.ac.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