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제47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 권민(문화인류 3)
  • 승인 2023.12.04 1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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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의 미래는

  자려고 마음먹은 지 장장 세 시간이 넘었다. 대학 졸업장 하나를 좀 따보겠답시고 반나절 내내 머리를 굴려댔던 게 여간 피곤했던 탓인지 무릎까지 뻐근하게 아파 일찍 누웠는데 잠에 들지 못했다. 괜히 요상한 마음에 좁은 기숙사 방 안을 서성거리다 어쩔 수 없이 스탠드 불을 켜고 앉았다. 글을 쓰지 않으면 못 배길 듯한 마음이다.

  글이라, 사실 글 따위에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 적은 없다. 아니, 오히려 투철한 사명감으로 글을 쓰는 건 조금 볼썽사납다고 생각하는 쪽일까. 글의 기세는 한풀 꺾이고 점점 새로운 매체들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나는 그게 은근히 마음에 드는 쪽이다. 글만큼 내밀하고 솔직해야 하는 건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글로는 정말로 솔직해질 수 없다고 느껴 왔다. 아무 방패막이도 없이 오로지 나로서 나서야 하는 특성 탓에, 웬만한 각오와 용기가 아니라면 그저 횡설수설 둘러대다 끝나 버리기 일쑤기 때문일까. ‘좋은 글’은, 쓰는 사람도 보는 사람도 각오와 용기를 다져야 함이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각오나 용기가 다져진 사람은 아니다. 내가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에 새로운 매체들의 부상을 응원하게 되는 걸까?

  그렇다면 오늘처럼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느끼게 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각오도 용기도 사명감도 없이, ‘좋은 글’이 아닐 것이라는 자학적인 믿음으로 쓰는 글을 왜 쓰려고 하는 것일까? 왜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럼에도’ 글이 있어야 한다고, 언제부턴가 달라져 버린 세상을 옹호하면서도 찜찜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은 글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다간 정말 사라져 버릴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오면, 세상이나 글의 미래에 대해 머리를 굴려 보겠답시고 책상에 앉을 수밖에 없게 된다. 어쩌면 뻔한 이야기라고, 내가 아니어도 이런 이야기를 할 사람은 많다고 생각하면서도, 부끄러운 글을 써나가는 건.... ‘좋은 글’이 뭘까. ‘글’은 뭘까. 왜 이제는 아무도 읽고 쓰지 않는 것일까. 설렘인지 불안감인지 심장이 뛰어 책상에 앉게 된 이유는, 이번 학술문예상 참여자가 부족하여 기간이 연장되었다는 글을 보아 버렸기 때문이다. ‘안타까움’ 따위를 넘어 버린 묘한 감정에 어쩐지 심장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나 또한 언젠가부턴 읽고 쓰지 않게 되었으니. 글이 버겁긴 하지, 라며 넘겨버리던 일상이었지만 유난히 덜컹 마음이 내려앉은 이유는 대신 글을 계속해줄 사람이 몇 남지 않았구나 체감했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는 계속 읽을 것이라고, 누군가는 계속 쓸 것이라고... 그러니까 언제든 용기가 생길 때 글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돌아갈’ 곳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마음에 울렁 움직이게 된 걸까.

  그렇다, 글과는 붙었다 멀어졌다를 반복하는 묘한 관계를 맺었던 것 같다. 이해하려고 하고 해석하려고 하는 마음이 주체할 수 없어질 때는 글만 한 친구가 없었지만, ‘세상’과 너무 멀어져 버린 느낌이 들 때나 마음만 너무 앞서 빈약하고 허술한 글이 수치스럽게만 느껴져 낙담할 때는 그렇게 저주스러울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렇게 특별한 경우도 아닌 것 같다. 아마 글을 조금이라도 접한 사람이라면 공감하지 않겠나. 그런데 글과 가까워지는 주기는 점점 멀어지더니 이제는 점점 버거운 마음이 커져 버렸다. 부딪히고 깨져야지만 해낼 수 있는 것들을 지속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이제 막 스무 줄에 들어선 입장에서는 내 탓인가, 아니면 세상이 바뀌어버린 탓인지도 가려내기 어렵다. 어찌 됐든 완벽하지 않은 것을 내보이는 쪽, 그러니까 글 따위를 마음에 두고 있는 쪽은 바보 취급 당하기 딱 좋은 세상이다. 요즘 애들이 문제라든지 옛날이 좋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애초에 나도 요즘 애들이다, 옛날이 어땠는지도 모른다. 그저 나도 글에 마음을 거는 쪽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바보일지도 모르겠다고 종종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글 쓰는 것이, 글 쓰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수밖에. 멋있다고 느끼는 걸 쓰는 건 부족한 주제에 겉멋 들어 설치는 것 같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쓰려는 건 용기 없고 지루해 보인다. 어떤 글을 써야만 한없이 뒤를 쫓아 오는 자괴감의 늪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는 걸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혼란과 부끄럽고 싶지 않다는 마음만 커지고, 그러다 보면 전혀 쓰지 않게 되었다.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복잡하고 어려운 글은 아니꼬움에 짜증이 나고 나름 진솔해 보이는 글도 느껴지는 자의식에 덩달아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그런 마음에 툭 책을 덮기 일쑤였다. 꼭 다정하거나 쓰는 자의 노고를 치하해 글을 소중히만 여겨야 하는 건 당연히 아니지만, 문득 돌이켜 보면 그렇다. 자의식 없이 글을 쓴다는 것도 불가능할뿐더러 글에 사람의 모든 것이 담길 수 있는 것은 아닌데도 말이다. 또 설령 조금 우쭐해진대도, 연약해 보인대도 그것이 뭐가 문제겠는가. 글이 아니면 보일 수 없는 부분이 아닌가.

  그러니까 글이 왜 자리를 잃는가 한다면, 단문과 영상에 익숙해진 ‘요즘 애들’의 문해력 부족과 게으름 때문이라고 투덜대는 걸로 끝날 수는 없다. 세상이 부족함을 받아주지 않고 있다.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유달리 각오나 용기가 부족한 경우가 아니라 아마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마음일 것이다. 그러니까 ‘글 존속 위기’ 따위의 말이 자꾸만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밀하고 솔직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이야기는, 그래서 글을 쓸 때도 읽을 때도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그런 뜻이다. 문장력을 지적받고 논리를 지적받을 각오나 용기를 넘어, 조금은 조잡한 쪽의 자신을 그대로 보여줄 마음가짐. 그리고 그런 것을 받아내 줄 마음가짐. 그러나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는 데 필요한 각오와 용기가 이제는 너무 커져 버리고 말았다. 부족함은 과정이 아니라 죄악이다. 그렇다면 부족한 면을 가감 없이 드러낸 글을 보이는 것도, ‘쓴다’는 것 자체도 죄악이 된다.

  왜 세상이 그렇게 되었냐고, 정말 그렇긴 하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요즘 애들이 오냐오냐 커서 오만하고 기고만장해서 그렇다는 말부터, 인간의 가치가 시장 기준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라고 짧은 가방끈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나 윤리가 가치판단에 적극적으로 개입했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던가. 그런데 사실은 전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 문장을 맞게 쓴 건지도 모르겠고. 또 기껏 열심히 쓴 글을 이해도 못 한 논리와 복잡한 문장으로 점철시켜 다시는 돌아보지 못할 부끄러운 글로 만들고 싶지도 않다. 조금 더 ‘잘 쓰는’ 것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도 조금 있으니 아쉬울 따름이지만 감당할 수 있는 이야기를 솔직하게 쓰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즉... 몇 개를 골라 멋들어지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 내 이야기를 조금 하고 싶었을 뿐이지 사회 현상을 적극적으로 비판할 생각도 없다. 그런 세상이지만 나서서 솔직한 글을 쓰라고, 청년들이여 일어나라고 공표할 생각도 아니다. 그러니 학우들이여 더 읽고 쓰시게나 설치며 글을 마무리할 생각은 없다. 일단 나만큼 글에 존경심이 부족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런 말로 잘난 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제일 ‘반성’해야 하는 쪽은 아마 나일 것이다. 조금 단호하게 말하자면, 계속 그렇게 혼내려고 드는 사람에겐 열심히 동조해줄 마음도 없다. 그야 다들 글을 사랑한다는 것을 안다. 공유하고 있는 위기감 또한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이들 망설이기 때문에, 혹은 지금은 글과 먼 관계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학술문예상의 존속이 걱정될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러니 더는 지켜만 볼 수 없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야 했다. 왜 다들 글을 피할까. 나는 왜 글을 피할까. 글을 싫어한다,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주변의 아무도 글을 바보 취급하지 않았다. ‘싫다’고 표현한다면, 그건 글이 너무도 어렵고 두려운, 부끄럽고 먼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들뜬 바보가 되어서 글을 업신여기는 것은 아닐 게 분명하다. 적어도 내가 본 사람들은, 그리고 나는 그랬다. 또, 그래도 돌아갈 곳은 항상 글이었다. 그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제야 나서 보았을 뿐이다. 이것은 순전히 나의 ‘반성문’ 같은 글이다. 다른 점이라면, ‘앞으로는 많이 읽고 많이 쓰며 글의 소중함을 되새기겠습니다’ 따위의 문장이 없다는 점일까. 이 글에서는 솔직하기로 했다. 그런 다짐을 할 생각도 없고 한다고 실행할 자신도 없기에, 쓰지 않겠다. 다만, 다시 한번 되새긴 것이다. 왜 망설였는지. 글이 무엇이었는지. 그렇다면 다시, 얼마의 시간과 어떤 과정을 거쳐서든, 돌아가게 되리라. 다시 읽고 쓰며 조금씩 킥킥거릴 수 있겠다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이라면, 이제는 글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번 돌이켜 보고, ‘앞으로는 어떻게 글과 살아갈 수 있을까’ 함께 고민하고 읽고 써 보는 건 어떻겠냐고 부탁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다음 학술문예상이 또 있기를. 나의 ‘돌아갈 곳’을 함께 지켜주기를 바라며.

 

 

  <제47회 학술문예상 수필 가작 수상소감>

  하필이면 가장 부끄러운 글로 수상하게 되어서 어쩐지 기쁘기보다는 착잡한 기분입니다. 사실은 두 부문에 제출했는데, 오히려 ‘다신 펼쳐보기 싫었던’ 글인 수필이 수상 됐다는 점이 다시 ‘좋은 글’에 대해 성찰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응모 예정이 없었습니다만, 이번 학술문예상 수필 부문의 응모가 부족해 기간이 계속해서 연장되는 것을 보고 동정심 반 걱정 반, 마감 며칠 전에 급히(혹은 관점에 따라 대충) 작성한 글이었습니다. 조금은 안일한 마음으로 제출한 글이었던지라 차마 떳떳하게 상을 받지 못하는 걸까요?

  어쨌든, 그럼에도, 이 글은 제가 아주 오랜만에 즐거운 마음으로 써낸 글이기도 합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읽으신 모든 분께도 다시 한번 글과의 재미있는, 즐거운 만남이 찾아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또 다음이 있다면, 그때는 조금 더 단정한 글로 응모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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