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어떻게 투표해야 하는가
왜, 어떻게 투표해야 하는가
  • 조한욱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승인 2012.12.03 15: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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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선이 다가온다. 그러나 식상한 정치권의 행태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은 투표에 별 관심이 없다. 그들은 기권을 하는 것도 의사표시의 하나라고 말한다. 게다가 최근 한 유력한 후보가 사퇴를 선언하자 지지자들 중에는 투표장까지 가야 할 유발요인이 없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는 해야 한다. 권리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의무를 준수하기 위해서 해야 한다. 그것이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개인이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시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이기 때문이다.


  다수결과 일반의지
  장자크 루소는 계몽철학자로 분류되지만 계몽사상에 반발한 낭만주의의 선구로도 꼽힐 만큼 생각의 폭이 넓은 사람이었다. 수많은 그의 이론 중에서도 오늘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사회계약론>에서 밝힌 ‘일반의지’의 개념이다. 그것을 참조하면 우리는 투표의 당위성은 물론 구체적 실행 방도까지 확인할 수 있다.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의 운영에 관한 여러 견해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보통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을 사용한다. 그리하여 하나의 안이 결정되면 그것을 따른다. 루소에 의하면 우리가 그것을 따라야 하는 이유는 다수결의 법칙 자체가 약속으로 확립된 것이며, 또 암묵적으로나마 적어도 한 번은 그것에 따르겠다는 만장일치의 동의가 있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동의에 의해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게 한 표씩을 행사한다. 비록 모든 사람이 타고난 신체적 능력이나 재산에 있어 결코 평등하지 못하다 할지라도, 그 만장일치의 동의에 의해 모두가 전체 공동체에 자신의 권리를 양도함으로써 평등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수결로 결정된 안이 반드시 일반의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일반의지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들의 잡다한 뜻을 단순하게 모아놓은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개인들의 특수한 의지를 산술적으로 합산한 ‘전체의지’에 불과하다. 그와 다르게 일반의지는 공동체 성원 모두를 ‘위한’ 공공선이 되어야 한다. 일반의지는 공동체의 의지이니 그것이 결정되면 모두 따라야 한다. 그 일반의지를 찾아야 한다. 다수결의 결과를 일반의지와 일치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반의지를 찾아서

공동체의 운영에 있어 일반의지를따라야 한다고 말한 장자크 루소

  일반의지라는 모호하게 들리는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투표에 견주어 설명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투표를 할 때 자신이 속한 지역이나 사회적 분파의 이익에 따라 표를 던지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반의지를 찾으려는 행동이 아니다. 국가건 지역자치 단체이건 예산은 한정돼 있다. 어느 한 집단에 혜택을 주면 그 결과 반드시 불이익을 받는 집단이 생긴다. 그러니 그런 대안은 결국 공동체의 분열을 야기할 씨앗인 셈이다. 그런 대안에 표를 던지는 것은 이기심이라는 특수의지의 발로일 뿐 결코 일반의지를 추구하는 행동이 아니다. 이를테면 지난 선거의 뉴타운 공약처럼 특정 지역 주민의 이익을 내세워 선출된 자들은 일반의지가 반영된 결과가 아니다. 그런 투표의 혹독한 결과를 우리는 이미 맛봤다.

  루소는 말한다. “일반의지가 충분히 표명되기 위해서는 국가 내부에 부분적 사회가 없어야 하고 각 시민이 오직 자기의 의지만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국민은 개인으로서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공동체 전체를 위한 대안을 찾아 거기에 표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의 이기심을 내세운 후보나 거기에 부응하는 유권자는 모두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원리를 망각하고 있는 셈이다.

  일반의지는 공공의 선을 위한 것이며 그러한 공공선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쟁점에 대해 사람들이 충분히 알고 서로 의견을 교환해서 의견 차이를 좁히는 것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옳은 의결이 생기고 그것이 일반의지가 될 수 있다. 따라서 매체의 영향력이 커진 오늘날 TV 토론을 통해 서로의 견해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번 대선에서 지난 여러 차례 선거에 비해 TV 토론의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실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보다 공공선을 생각하며 투표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 할지라도 일반의지를 찾으려는 또 다른 방법은 존재한다. 그것은 최대로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의 의무를 행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표시간의 확대는 제도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그것이 논의될 기회조차 박탈한 사람들의 주장은 어떤 것이라 할지라도 민주시민의 의무를 행할 기회를 박탈한 사실에 대한 변명에 불과하다.

  참정권과 투표의 의무
  이 글에서는 계속 투표의 권리가 아니라 의무를 말했다. 투표의 권리를 말하는 사람들은 그 권리를 버릴 권리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오는 단견에 불과하다. ‘참정권’이라는 것은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이 투쟁을 통해 얻어온 결과물을 말하는 것이다. 왕과 성직자와 귀족만이 정치활동을 할 수 있었을 때, 거기에서 배제되었던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모여 이루어낸 것이 평민의 참정권이었다.

참정권이 국민의 권리에서 의무가 되기까지 긴 투쟁의 역사였다.
  그렇게 쟁취한 참정권은 이제 국민의 의무가 되었다. 투표의 기회를 날려보낸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이룩한 위대한 선조들의 역사적 성취를 무시하는 일이다. 그것은 미약하다 할지라도 모이면 큰 뜻이 될 수 있는 힘을 허사로 만드는 일이다. 그것은 그릇된 지도자가 들어서도록 방조하는 일이며, 참된 지도자가 뽑힌다면 거기에 무임승차하는 일이다. 또 다시 루소는 말한다. “누군가가 국가의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인가 하고 말한다면 그 국가의 운명은 이미 끝난 것이다.”

  플라톤은 “어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가 권력을 쥐었을 때 그것으로 무슨 일을 하는가에 달려있다”고 말하면서,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 권력을 휘둘러서는 안 된다”고 설파했다. 절대적 권력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부여돼야 한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가장 현명한 사람들이 자신이 아닌 대중을 위해 정치를 하는 것이 보장될 수 있도록 투표해야 한다.

  법 앞의 평등
  일반의지가 글로 표현된 것이 법이다. 루소의 중요성은 “사람들이 최고의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은 법이며, 그 앞에선 신분에 상관 없이 모두가 평등하다”는 주장에 있다. 18세기에는 봉건 잔재 타파를 부르짖은 계몽철학자들마저 대다수가 계몽전제군주들과 교제를 트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루소는 왕을 포함한 그 누구도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18세기 유럽의 왕국보다 진일보했다는 21세기 이곳의 민주공화국에서 루소의 목소리가 더욱 절절하게 울려퍼진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더 많은 사람들이 일반의지를 반영하는 한 표를 행사하기를, 그리하여 그것이 구현된 법 앞에서 모두가 평등해지기를 갈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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