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지워진 여성들
전쟁에서 지워진 여성들
  • 김도윤 기자
  • 승인 2026.09.01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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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져 있던 전쟁 속 여성들의 이야기를 파헤치다

  최근 영화 <오디세이>로 인해 트로이 전쟁을 이끈 오디세우스의 영웅담이 다시 인기를 끌고 있다. 신화를 접한 사람들은 트로이 전쟁을 남성 영웅과 승리의 서사로 기억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에서 고통받은 여성의 삶은 소외되거나 틀에 박힌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에 전쟁에서 지워진 여성들의 삶을 알아보고자 한다.

 

  전쟁 속에서 도구화된
  여성의 신체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당시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사람들은 늘어나는 참상에 무관심해졌지만 민간인이 겪는 피해는 꾸준히 커지고 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 사무소가 발표한 ‘우크라이나 에너지 기반 시설에 대한 공격 및 우크라이나 인권 상황 업데이트’ 보고서에 따르면 2025년 12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우크라이나에서 최소 8,143명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전년 대비 40% 증가한 수치다.

  전쟁의 장기화로 사람들의 일상이 무너지는 가운데 여성들은 성폭력이란 또 다른 형태의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최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 포로와 점령지 민간인을 대상으로 성폭력과 성적 고문을 자행했다는 증언이 이어졌다. 지난 6월 우크라이나 검찰총장실 발표에 따르면 러시아군 전면 침공 이후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401건이 확인됐다. 이 가운데 여성 피해자는 250명으로 전체의 절반을 넘었으며 미성년 여성 피해자도 23명에 달했다. 또한 지난 7월 미국 언론사인 월스트리트저널은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 포로와 점령지 민간인을 대상으로 성폭력과 성적 고문을 자행했다는 증언과 조사 결과를 보도했다.

  전쟁에서 여성의 신체가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일은 과거에서부터 반복돼 왔다.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 제국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성착취를 당한 여성들을 일컫는다. 일본군은 ‘위안부’ 여성들에 대한 성착취를 군의 전쟁 수행 체계와 결합해 정당화했다. 2014년 이라크와 시리아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한 테러 집단 IS는 여성과 소녀에 대한 성폭력을 종교적 명분으로 묵인했다.

  전쟁에서 발생하는 성폭력은 우발적인 일회성 범죄에 그치지 않는다. 전쟁 속 성폭력은 여성의 신체를 도구화하며 전쟁의 또 다른 무기가 되기도 한다. 결국 전쟁에서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개인의 피해 사례를 넘어 여성의 존엄과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훼손하는 문제로 바라봐야 한다.

분쟁 관련 성폭력 피해 현황
분쟁 관련 성폭력 피해 현황 <출처/유엔>

 

  전쟁이 끝나도
  변하지 않는 현실

  전쟁 지역을 벗어난다고 해서 여성들의 안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피란 과정에서 삶의 터전을 잃은 여성들은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도 위험에 노출된다. 유엔인구기금이 지난 3월 발표한 ‘증거를 행동으로 옮기기’ 보고서에 따르면 수단의 25~49세 여성 응답자 가운데 76%가 자신이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불안을 느끼는 장소는 난민캠프와 거주지를 비롯한 △캠프 밖의 시장 △급수 장소 △땔감 수집 장소 △도로·거리까지로 확장된다. 이는 여성들이 전쟁 지역에서 벗어나 일상 곳곳에서도 안전을 위협받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난민 여성들은 생존을 위한 식량과 의료 서비스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성착취에 노출되기도 한다. 구호물자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서 권한을 가진 이들이 여성에게 성관계를 요구하거나 이를 대가로 지원을 제공한 사례가 보고됐다. 보호와 지원을 위해 마련한 공간에서조차 여성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대학 차미리사교양대학 김주희 교수(이하 김 교수)는 “국제기구나 구호단체 관계자에 의한 성 착취는 보호와 지원을 위해 부여된 권한과 자원을 이용해 발생한다는 점에서 책임이 무겁다”며 “해당 기관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의무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형사적 △조직적 △제도적 책임을 분명히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전쟁 중 여성이 담당했던 노동은 쉽게 지워지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는 남성 노동력이 전쟁터로 이동하면서 산업 현장의 인력 부족이 심화했다. 이에 정부는 여성의 노동시장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리벳공 로지’를 내세웠다. 리벳공 로지는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을 표현한 문화적 상징으로 여성들의 군수 공장 취업을 독려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자 여성에게 다시 가정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쟁 중에는 국가를 위해 필요한 노동력으로 차출됐던 여성들이 종전 이후 전통적인 성 역할 속으로 다시 밀려난 것이다.

  이처럼 전쟁이 끝난 뒤 가부장적 질서가 강화되는 현상은 여성의 삶을 제한한다. 사만다 브래들리의 논문 ‘분쟁 후 공동체에서의 가정 폭력 및 가족 폭력’에 따르면 분쟁이 끝난 뒤에도 가부장적 권력 구조가 지속되면 여성에 대한 가정 폭력이 증가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쟁으로 인한 폭력이 공적 영역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여성의 삶 속 폭력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전쟁 중 강화된 권력과 성별 규범이 일상으로 이어지며 여성은 다시 가정과 사회 안에서 불평등에 직면하게 된다.

리벳공 로지의 We Can Do It! 포스터 출처/하워드 밀러
리벳공 로지의 We Can Do It! 포스터 <출처/하워드 밀러>

 

  평화 협상 테이블에서
  배제되는 여성들

  여성들은 전쟁 과정에서 다양한 피해를 입지만 전쟁 이후 질서를 결정하는 과정에선 충분한 자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2024년 유엔여성기구가 조사한 ‘유엔 평화 프로세스 모니터의 조사’에 따르면 공식 평화 협상 과정에서 여성 협상가는 평균 7%, 중재자는 14%에 그쳤으며 평화 회담에 여성이 참여하지 않는 경우도 존재했다. 이는 유엔이 제시한 평화 과정 내 여성 참여 최소 3분의 1 목표와 여성차별철폐위원회가 권고한 의사결정 과정의 성평등 목표에 미치지 못한 수치다.

  무력을 행사한 당사자 사이에서 진행되는 구조의 평화 협상 역시 전후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여성 배제를 심화한다. 전쟁을 결정하고 수행한 정치·군사 지도자들이 협상을 주도하면서 전쟁에서 지도 자격을 가지지 못한 여성들의 경험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여성들이 전쟁 중 겪은 △성폭력 △피란 △생계와 돌봄 문제는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들이 평화 협정에 반영되지 않는다면 여성이 진정한 평화를 누리긴 어렵다.

  여성이 평화협상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여성의 대표성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는다. 여성은 △분쟁 예방 △조기 경보 △평화 조성 △평화 유지 △분쟁 후 해결 등 여러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지닌다. 2015년 국제평화연구소가 발표한 ‘평화 구축 재구상하기’ 보고서 부록에 실린 로컬 스톤 연구 통계에 다르면 여성이 평화 과정에 참여한 경우 평화협정이 체결된 이후 15년 동안 유지될 가능성이 35%로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여성의 참여는 상징적 요구를 넘어 지속 가능한 평화를 만드는 조건과 맞닿아 있다. 전쟁으로 삶이 무너진 사람들의 목소리를 평화 협상에 담기 위해서는 모든 여성에게도 협상의 주체로서 자리를 보장해야 한다.

단 한 명의 여성도 없는 2026년 미중 정상회담
단 한 명의 여성도 없는 2026년 미중 정상회담 <출처/신화통신>

 

  전쟁을 바라보는
  사회적 서사의 중요성

  현재 우리 사회 내에선 피해 사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행위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링겔블룸은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된 유대인들의 삶과 역사적 증언이 담긴 쪽지를 모아 우유통과 상자에 숨겨 보관했다. 이후 발굴된 쪽지는 나치의 범죄를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자료가 됐다. 이처럼 증언과 기록은 피해자의 경험을 인정하고 사건을 역사적 책임의 문제로 전환한다. 이는 피해자의 회복과 역사적 정의를 위한 중요한 과정이다.

  그러나 전쟁의 피해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과정에서의 변화도 필요하다. 피해자에게 증언을 수집하는 활동은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고통을 다시 겪게 한다. 따라서 기록을 남기는 과정이 피해자들에게 또 다른 부담이나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치유를 위한 활동과 연계돼 이뤄져야 한다.

  역사는 △전투 △영웅 △승전 △군인 △지도자를 중심으로 기록되며 여성들이 수행한 △노동 △돌봄 △피난 △생존의 활동은 후방의 일이나 사적인 일로 취급됐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 없이는 전쟁 수행도 전후 사회의 회복도 불가능하다. 김 교수는 “남성들의 승전과 귀환의 서사는 그 전쟁을 견뎌야 했던 여성들의 삶과 전혀 다른 시간과 경험으로 이뤄져 있다”며 “동시에 전쟁을 경험하는 여성과 남성의 삶이 얼마나 다르게 조직되는지에 대한 사회적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사건 속에서 여성의 삶과 존엄을 지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전쟁의 역사를 여성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이 확산될 때 여성은 영웅 신화의 일부를 넘어 전쟁을 견뎌낸 역사적 주체로 기록된다. 이제는 전쟁의 역사에 여성의 이야기를 온전히 담아낼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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