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 마감 전날 밤, 빈 문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결국 생성형 AI 창을 열어본 경험, 다들 있을 것이다. “이주제로 목차 좀 짜줘” 한마디에 1초도 안 되어 그럴듯한 답이 쏟아지면 앓던 이가 빠진 듯 속이 다 시원하다. 그런데 잠깐, 우리는 방금 무언가를 슬쩍 남에게 넘겨버린 건 아닐까.
최근 필자는 창의성 요구 수준이 서로 다른 세 개 교과목 수강생 97명을 대상으로 이 궁금증을 들여다봤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자유로운 창작 수업이든, 정답이 정해진 이론 수업이든 상관없이 학생들은 하나같이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리는 단계’에서 AI에 가장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과목 성격은 달라도 백지 앞에서 얼어붙는 이른바 ‘백지 공포증’을 피하려는 반사적 손놀림은 똑같았던 셈이다. 이를 필자는 ‘인지적 외주화(Cognitive Outsourcing)’라 부른다. 원래 내가 머리를 싸매고 해야 할 몫을 슬쩍 기계 쪽으로 밀어버리는 현상이다.
더 흥미로운 지점은 그다음이다. 창의성을 가장 많이 요구하는 수업의 학생들은 학기 말 “나 AI 좀 쓸 줄 안다”는 자신감이 세 집단 중 가장 낮았다. 그런데 정작 아이디어를 낼 때 AI와 “주도적으로 협업했다”고 자평한 점수는 오히려 가장 높았다. 앞뒤가 안 맞는 이 모순을 심리학에서는 ‘이해의 착각(Illusion of Explanatory Depth)’이라
부른다. AI가 유창한 결과물을 툭 던져주면 우리는 그 과정을 내가 주도한 것처럼 느끼기 쉽다. 조수석에 편히 앉아 있으면서 스스로 운전을 잘한다고 믿는 셈이다.
예전 칼럼에서 필자는 ‘꿀강의’만 찾아다니면 학문적 근력을 못 키운다고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사실 지금 우리가 AI를 대하는 태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심리학자 로버트 비요크(Robert Bjork)는 머리가 꽉 막히는 그 답답한 순간이야말로 뇌가 제일 열심히 일하는 시간이라며 이를 ‘바람직한 어려움(Desirable Difficulties)’이라 불렀다. 그
답답함을 뚫고 나가야 진짜 내 생각에 근육이 붙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힘든 구간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지도를 AI에게 맡겨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AI를 멀리하라는 말은 아니다. 순서만 한 번 바꿔보자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역방향 인간-AI 협업(Reverse Human-AI Collaboration)’이라 이름 붙였다. 먼저 혼자 끙끙대며 엉성해도 내 생각의 뼈대를 세운다. 그 다음에야 AI를 불러 “이 논리의 약점이 뭐야?”, “반론 좀 해봐!”라며 까다로운 심사위원 역할을 맡긴다. 마지막으로
그중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버릴지는 반드시 내가 정한다. 이 순서만 지켜도 AI는 내 생각을 대신하는 대행자가 아니라 내 생각을 날카롭게 벼려주는 파트너가 된다.
다음 과제를 시작할 때 AI 창을 열기 전 딱 10분만 버텨보면 어떨까. 그 10분의 막막함이야말로 여러분을 단순히 ‘AI를 잘쓰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시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