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작가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세 여성의 시선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는 노벨문학상과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하며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올해로 78주년을 맞은 제주 4.3사건을 추념하기 위해 소설의 배경이 된 4.3 유적지를 따라가봤다.
내 하나 건너면
있었던 곤을동 마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는 친구 ‘인선’이 제주 4.3사건을 겪은 자신과 어머니 ‘정심’의 이야기를 주인공 ‘경하’에게 전해 주며 전개된다. 소설에서 인선은 경하에게 자신의 집에서 내 하나만 건너면 마을 하나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 마을은 원래 사십 호 안팎의 집들이 모여 있었지만 1948년 소개령 때 모두 불타 사람들이 몰살되며 사라졌다고 전해준다.
인선의 집 근처 ‘내 하나 건너면 있던 마을’은 바로 곤을동 마을이다. 1948년 10월 17일, 이승만 정부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이는 소개령으로 이어져 중산간 마을 주민들은 해변마을로 강제 이주한다. 이후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며 군사 경찰(이하 군경)은 중산간 마을에 불을 지르고 주민들을 살상했다. 더해 중산간 마을을 도왔다는 이유로 해변마을 주민들까지 학살했다.
곤을동은 당시 군경에 의해 불타 없어진 해변마을 중 하나로 제주 4.3사건이 일어나기 전 곤을동 마을엔 총 67가구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949년 1월 4일 군경은 곤을동 마을을 포위한다. 이어 마을 주민들을 전부 모이게 한 뒤 곤을동 바닷가로 끌고 가 학살하거나 화북초등학교에 가뒀다. 화북초등학교에 가둬진 마을 사람들 역시 화북동 바닷가에서 학살당한다. 군경은 곤을동의 집들을 전부 불태워 학살의 흔적을 지웠고 결국 곤을동 마을 전체가 사라지게 된다. 이후 인적이 끊기며 지금의 곤을동은 잃어버린 마을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현재 곤을동을 방문하면 아직 남아있는 집터의 모습과 올레길을 볼 수 있다. 또한 곤을동 모습을 재현한 조감도를 통해 이젠 볼 수 없는 당시 마을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창호지 구멍으로 본
표선 한모살 학살
인선은 경하에게 제주 4.3사건을 알려주면서 사건의 자료집을 건넨다. 해당 자료집엔 살아남은 피해자들이 문 창호지 구멍으로 목격한 끔찍했던 학살에 대한 증언이 담겨 있었다.
'해거름에 트럭으로 두 대 가득 사름들이 실려와서. 못해도 백 명은 되실 거라. 군인들이 저 모살왓에 총검으로 네모지게 금을 그어놔그네, 사름들신디 그 안에 다 서 이시랜 하데. (중략) 군인들이 뒤에서 총을 쏴그네 몬딱 앞으로 넘어지는 거라.'
소설에서 ‘모살왓’이라고 표현된 장소는 표선 해수욕장 옆에 위치한 모래사장인 한모살이다. 특정 공간을 지칭하는 곳이 아닌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표선면 바닷가를 아울러 의미한다. 1948년 12월 일주일간 한모살에서만 제주도민 약 200여 명이 학살됐다. 한모살 곳곳에서 총살이 일어났으며 현재 제주 4.3 유적지로 지정된 도서관 입구 공터에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다. 지금은 희생된 주민들을 기리기 위해 4.3희생자유족회 표선면지회에서 세운 표석과 동백꽃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동백꽃 조형물은 꽃이 질 때 꽃망울 전체가 그대로 떨어지는 것이 특징으로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연상시켜 이들의 희생을 기린다는 의미에서 제주 4.3사건을 상징한다.
막냇동생이
죽은 버들못
소설 속 인선의 어머니 정심은 어렸을 당시 마을 사람들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학살당했다고 말하며 잔혹했던 과거를 회상한다. 한밤중 군인들이 침입해 사람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은 뒤 근처 밭이나 물가에서 사살했다고 전해주며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정심의 막냇동생과 오빠가 사라진다. 온 가족은 마을 사람들이 죽은 시신이 있는 보리밭과 불탄 집터를 샅샅이 뒤져 막냇동생과 오빠를 찾는다. 저녁이 돼서야 발견한 막냇동생은 배와 턱 아래쪽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고 있는 상태로 발견된다. 하지만 통행금지령으로 병원을 가지 못해 이모는 옷으로 지혈하고 어머니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낸 피를 막냇동생에게 먹인다. 그러나 막냇동생은 결국 살아나지 못한다.
정심의 막냇동생이 발견된 장소는 ‘버들못 학살터’다. 실제 버들못과는 약 430m의 거리가 있으나 해당 장소를 부르는 특정한 이름이 없어 버들못 학살터라 불린다. 1948년 12월 22일, 이곳에서 표선국민학교에 수용됐던 주민 76명이 집단 총살 당한다. 이날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은 흙으로 덮어진 채 약 1년 정도 방치됐다가 재건되면서 유족들의 품으로 돌아갔다. 현재 버들못 학살터는 과수원으로 자리 잡았으며 제주 4.3사건 당시 버들못 학살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담은 설명문을 통해 잔혹했던 참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주정공장 수용소에
억울하게 갇힌 사람들
군경은 무장대를 진압하기 위해 무자비한 민간인 학살을 감행했고 제주도민들은 군경을 피해 산으로 도망갔다. 1949년 3월, 군경은 자수하면 처벌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어 산에 올라간 도민들을 유인해 많은 사람들이 산에서 내려온다. 사라졌던 정심의 오빠 또한 군경의 말을 믿은 채로 하산한다.
처벌하지 않겠다던 약속과는 달리 군경은 수천 명을 체포해 주정공장 수용소에 가둔다. 소설 속 정심의 오빠가 가둬진 주정공장 수용소는 일제강점기 시절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알코올을 생산하기 위해 만든 공장이었다. 그러나 이 공장은 제주 4.3사건 당시 도민들을 가두는 수용소로 쓰인다. 수용된 제주도민은 2,530명으로 이들은 혐의를 입증한 증거나 판결문도 없이 불법 재판을 받고 자신의 형량조차도 모른 채 육지 형무소로 이송된다.
억울한 수용자들의 아픔을 기억하기 위해 주정공장 수용소 4.3역사관이 설립됐다. 주정공장 수용소 4.3역사관의 야외전시장엔 포승줄에 묶여 끌려가는 사람들과 눈물을 형상화하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조형물 속 사람들의 표정에는 억울함과 무기력함이 담겨 있다. 조형물 우측엔 동굴이 위치해 있다. 이는 군경들이 수용자들을 모아 학살하던 곳으로 깜깜하고 차가운 동굴 속에서 무고한 죽음을 느낄 수 있다.
내부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1층에는 추모의 방이 운영되고 있다. 추모의 방은 생사를 알 수 없거나 육지 형무소로 끌려가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행방불명된 3,994명의 영혼을 위로하는 공간이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희생자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나타나고 수감자들이 옥중에 보낸 편지 내용의 일부가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지하 전시관으로 내려가면 △주정공장 설립 배경 △예비검속 △실체 없는 허구 재판 △수감자의 옥중 편지 등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제주 4.3사건 전반에 대해 알 수 있다.
책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제주 4.3사건을 표현한다.
“죽은 이를 살려낼 수는 없지만 죽음을 계속 살아 있게 할 수는 있다. 작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제주도 곳곳에는 희생된 사람들의 아픔이 여전히 남아있다. 어느 날 사라진 마을과 텅 빈 공터 그리고 깜깜한 수용소에는 모두 이유도 모른 채 죽고 고통받던 사람들이 있었다. 무고한 희생자들이 죽어간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려면 지나간 상흔을 기리며 오랜 시간 작별하지 않은 채로 기억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