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회 학술문예상 평론 가작
제47회 학술문예상 평론 가작
  • 장효진(영어영문 4)
  • 승인 2023.12.04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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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즈 앤 올>의 로맨스와 핏자국

  십대를 주인공으로 한 여느 영화들이 그렇듯, 카메라는 학교의 풍경을 비춘다. 재빠른 패닝으로 입장한 강당 안에는 소녀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고, 그 뒤에는 성조기가 걸렸다. 친구의 초대에 수줍어하던 매런(테일러 러셀)은 밤늦게 집을 몰래 빠져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고도 잔혹한 소녀의 행동에 관객은 눈을 휘둥그레 떠야 한다. 매런은 순식간에 친구의 손가락을 물어뜯고, 관객은 겹겹의 자물쇠가 매런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매런은 이따금씩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고, 아버지는 보호자 역할에 진력나 매런을 떠나기에 이른다. 드넓은 미국 땅에 주인공이 홀로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본즈 앤 올>이 그리는 ‘사랑의 세계’
  카밀 데안젤리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본즈 앤 올 (Bones and All, 2021)>은 식인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소녀, 매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매런은 다른 사람의 피와 살을 먹어야만 하는 본능을 지닌 채로 태어났다. 영화는 정확히 설명해주지는 않지만 이 본능이 모계 유전일 것이라는 암시를 남긴다. 영화의 초반, 매런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아버지는 이따금씩 본능을 억제하지 못하고 타인을 물어뜯고 마는 매런과 함께 도망 다니는 삶에 지쳤다. 그는 결국 매런이 열 여덟이 되는 해에 출생신고서와 자신의 목소리가 녹음된 테이프만을 남긴 채 떠나고, 매런은 집 안에 틀어박히는 대신 엄마를 찾으러 길을 나선다. 배낭 하나와 워크맨, 읽을 책 몇 권을 지닌 채 매런은 그레이하운드 고속버스에 몸을 싣는다.

  첫번째 경유지에 도착한 밤, 그녀는 자신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또 다른 ‘이터(eater)’를 만난다. 나이 든 이터 ‘설리’(마크 라일런스)는 매런을 친절하게 대하는 듯하지만 속을 드러내지 않아 어딘가 수상하다. 그는 오래 살아남으면서 자신만의 사냥 루틴을 찾았고, 피해자들의 머리칼을 모으는 악취미를 지녔다. 매런은 그와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도망친다. 노련한 선배 이터에게서 사람의 냄새를 구분하는 방법, 그리고 나이가들수록 허기는 더 심해질 것이라는 정보만을 취한 채 도망친 매런은 두번째 도착지에서 한 소년을 만난다. 깡마른 몸에 제멋대로 걸친 옷가지, 염색한 머리카락은 주변 사람들에겐 불한당처럼 보이기만 하고, 그는 아이와 함께 있는 여성을 희롱하던 남자에게 싸움을 걸어 밖으로 나간다. 매런은 순식간에 리(티모시 샬라메)의 사냥 방식을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는 리가 약자를 구함과 동시에 -사실은 가족이 없는 사람임을 알고 뒤를 밟아 온-사냥감을 점찍고 살육을 저지르는 아이러니를 보여주지만, 바로 그 점이 매런을 끌어당긴다. 자신의 본능, 즉 타인을 죽여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을 어느정도 수용하고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인물이기에 그녀는 리를 눈여겨본다.

 

  뉴 로맨스
  영화에는 ‘미트 큐트(meet cute)’가 있기 마련이다. 로맨스 영화에서, 주인공의 상대 역을 소개하는 사건은 말 그대로 예상치 못한 귀여운 만남이다. 예컨대 영화 <로마의 휴일(Roamn Holiday, 1953)> 속 미트 큐트는 벤치에서 업어가도 모르게 잠든 오드리 헵번을 발견한 그레고리 펙이 차마 그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장면이다. 반면 리와 매런의 시작은 탐색이다. 식사를 마치고 피투성이가 되어 폐건물에서 걸어 나오는 소년에게 매런은 ‘아까 네 행동 멋졌다’ 라며 칭찬을 건넨다. 혼자 있는 쪽을 선호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는 모든 걸 처음 겪는 중인 매런이 용기있는 척 하려는 것을 보며 어쩔 수 없다는 듯 훔친 트럭의 조수석을 내어 준다. 둘은 빠르지만 요란하지 않게 서로에게 빠져든다.

  리에게 잡아먹힌 남자의 집에서 밤을 보낸 후, 두 사람은 평범한 식당 안, 평범한 가족들 사이에서 시리얼과 팬케이크로 식사를 한다. 로맨스 영화에서 연출되기 마련인 취향과 관심이 갈마드는 대화는 없다. 두 사람은 입을 열지 않고 대화하는 법을 알기라도 하는 듯 자꾸만 시선을 교환한다. 카메라는 사랑에 빠진 매런의 시선을 그대로 재현하면서 마주 앉은 배우의 얼굴 뿐 아니라 리의 손, 팔, 어깨를 차례로 보고 눈을 마주치는 섬세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둘은 누구에게서도 들어본 적 없던 말을 서로에게 해주기에 이른다. “착한 사람 같아서,” 라는 말이다. 대사는 건조하게 처리되지만 그런 순간에 두 사람은 서로를 믿고 사랑하게 된다. 서로를 착한 사람으로, 자신이 식인종이라는 사실을 배제하고 보아 줄 수 있는 사람임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매런은 트럭 뒷자리에서 밤 하늘을 천장 삼아 잠들고 일어나는 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본즈 앤 올>은 겉보기엔 아름다운 히피 커플처럼 보이는 두 인물이, 살인 행위가 아니라 사랑을 발산하는 이런 장면에서 동물성을 드러내도록 한다. 고전의 미트 큐트, 호러의 전형을 벗어난 새로운 로맨스의 시작이다.

  젋은 커플은 매런의 엄마를 찾아가는 길에 자유를 만끽하기도 하고, 사냥을 하고는 방금 먹어치운 사람에게 아내와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낙담하면서 갈등을 겪기도 한다. 야영을 하려던 어느 날, 매런과 리는 이번에도 냄새를 맡고 찾아온 이터들을 만나게 된다. 그날의 캠프파이어에서, 그들은 아이들에게 뜻밖의 가르침을 준다. 바로 이 허기에 어떤 최종적인 단계가 있다는 것, 즉 사람을 ‘뼈째 먹어치우는(bones and all)’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두 백인 남성은 앞서 매런이 만난 늙은 이터와는 또 다른 악취미를 가지고 있다.사람을 흔적도 없이 먹는 방법을 알 뿐만 아니라, 두 사람 중 한 명은 이터가 아님에도 식인을 즐기는 무뢰한이다. 매런은 살인에 도취되고 우월함을 느끼는 이들에 분개하고, 이 섬뜩한 이터(마이클 스털버그)는 리에게 “어쩌면 사랑이 널 자유롭게 할지도 모르지”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두 사람은 파트너들에게서 도망친다.

  매런의 엄마를 찾는 것을 목표로 했던 자동차 여행은 돌연 관객을 낙심하게 한다. 매런은 엄마가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끝내 마주친 그녀(클로이 세비니)가 폐인처럼 앉아 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그리고 딸이 찾아올지도 몰라 써둔 편지를, 세비니의 고해하듯 울먹이는 목소리가 한 자 한 자 들려준다. 그녀는 매런이 자신과 같은 이터인 것을 알고 그만 부녀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고통 속에 살던 그녀는‘사랑의 세계에 우리 같은 사람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쓰고, 이 고통에서 너를 해방시켜 주겠노라고 하며 매런을 죽이려 달려든다. 병원을 뛰쳐 나온 매런은 식인종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것인지 알면서도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묻는 리에게 매런은 뾰족한 답을 내놓지는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리를 떠나 홀로 생각하기로 한다.

  영화의 이야기는 이때부터 다소 힘을 잃는 듯 보인다. 매런은 얼마간 떠나지만, 이번엔 도망치지 않는다. 엄마처럼 되지 않겠다고 결정했으니, 그녀는 사랑을 선택하러 돌아온다. 그동안 리는 살육의 이미지가 덮쳐오는 악몽에 시달리며 기약 없이 그녀를 기다린다. 두 사람은 다시 여행을 떠난다. 그들은 이미 ‘사랑의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듯, 첫 여행과는 다른 안정감을 끌어안고 다시 달린다. 수평선과 맞닿아 끝이 보이지 않는 미국의 너른 땅을 배경으로 한 채, 이번엔 리가 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를 자신이 죽였다고 고백한다. 이전에는 첫 식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머쓱하게 웃었던 두 사람이 이번엔 살을 맞대고 앉아 지넝 서로에게만 들려줄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다시 부유해 한동안 정착해 평범한 삶을 살아보는 둘의 모습을 잠시 보여 주다가 순식간에 이야기의 끝에 안착한다.

  계속해서 매런의 뒤를 쫓은 늙은 이터, 설리가 침입해 갑자기 그녀를 공격한다. 마치 그녀가 자신을 배신했기 때문에 ‘같은 이터는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쩔 수 없이 깨야 한다는 듯, 그는 무맥하기만 한 자아를 들이밀면서 매런을 위협한다. 커플은 가까스로 그를 저지하지만 결국 리가 칼에 찔린다.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는 그는 매런에게 자신이 나쁜 사람이냐고 묻고, 매런은 ‘너는 좋은 사람이야’라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마침내 그는 그 말을 듣고, 매런에게 자신을 먹어 달라고 청하기에 이른다. ‘날 사랑해 줘, 먹어 줘(Just love me and eat)’라고 말하는 그를 매런은 거절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녀는 연인을 자유롭게 해 주기로 한다. 다음 순간, 집에는 작은 핏자국조차 남아있지 않다.

  <본즈 앤 올>은 어떤 관객에게는 젊고 아름다운 두 배우의 로맨스에 경악할 만한 호러 이미지를 퍼부어서 실패한 이야기, 혹은 납득할 만한 개연성이 없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기꺼이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의 이런 시도를 기꺼이 비호庇護하고자 하는 이유는 여럿이다. 매런과 리는 마른 빵만 먹으며 버티는 방랑자가 될 수 없다. 배고픔은 계속 찾아올 것이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불가피하다. 즉, 매런은 자신이 잊어버렸던 과거를 찾아내고, 무언가 답을 구하러 떠난다. 그러던 중 리를 만나 동행을 시작하고, 사랑에 빠지고, 자신과 같은 존재들도 만난다. 애초에 식인이라는 무서운 소재와 십대들의 로맨스가 공존하는 이 이야기를,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미국의 끝없는 외곽도로를 배경 삼아 스크린으로 옮겼다. 그리고 자신이 젊은 시절을 보낸 80년대를 무대로 동시대 관객에게 필요한 새로운 로맨스를 선사한다.

  식인이라는 소재는 <트와일라잇> 세계관 속 뱀파이어들이 목덜미를 깨물어 섹슈얼한 텐션을 만들어내는 것과는 달리 로맨틱하게 연출하기 어렵다. 잔혹한 이미지와 쇼크로 목숨을 잃을 것만 같은 끔찍한 고통이 수반되기 마련이다. 루카 구아다니노는 로맨스와는 손잡기 어려워보이는 소재를 한 세계에 공존하도록 했다. 혹자는 그 공존이 엉성하다고 느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원초적 공포와 낭만적인 무드를 오가는 이야기를 결합한 대담한 시도가 불러 일으키는 이질적 감각에서 비롯된다. 만듬새는 결코 그의 전작보다 엉성하지 않다. 되려 구아다니노의 이전 작품들을 고려하면 <본즈 앤 올>이 가진 장르의 다면성은 봉합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예컨대 전작 <서스페리아(Suspiria, 2019)>는 미국의 메노나이트 공동체 출신 소녀가 70년대 베를린의 현대무용단에 입단하는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당대 독일 사회의 정치적 혼란과 오컬트의 결은 다소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구아다니노가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떠올려 본다면, 오히려 <본즈 앤 올>이 가진 장르적 다면성은 되려 성공적이다.

  각각 캐나다와 미국 출신의 유망한 젊은 배우들, 테일러 러셀과 티모시 샬라메가 그려내는 사랑은 아름답고 귀엽기도 하지만 ‘하이틴 로맨스 영화’라고 부르기에는 누추하고도 섬뜩하다. ‘리’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는 구아다니노 감독의 전작 <콜 미 바이 유어 네임(Call Me by Your Name, 2017)>에서 첫사랑과 성장통을 겪는 ‘엘리오’를 연기해 호평을 받았다. 그는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는 백인 지식인 가족 내의 십대 소년 역할을 맡아 예민함과 여린 마음을 마음껏 연기한다. 반면 <본즈 앤 올>의 ‘리’는 깡마른 몸과 여기저기 새긴 문신, 성적 매력을 이용해 사냥하는 전략과 함께 미국의 외곽 지역을 떠도는 인물이다. 두 사람은 재주껏 사냥하고 들키지 않으면서 살아남아야 하지만, 조언을 해줄 어른이 아니라 서로에게 의지해야 할 뿐이다. 테일러 러셀 역시 이런 상황 속에서 사람들을 경계하는 매런을 연기하며 티모시 샬라메와는 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매런은 모든 것이 처음이다.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 처음으로 배고픔을 의식한 채 살육하는 것, 사랑에 빠지는 것도 모두 처음 겪는 일이다. 그녀는 시신을 게걸스레 먹어치우지만, 테일러 러셀은 사나운 육식동물을 연기하지 않았다. 많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얼굴인 이 캐나다 출신 배우의 반짝이는 눈은 풀숲에서 상대를 천천히 경계하고 탐색하는 사슴의 것처럼 보인다. 두 배우는 그렇게 리와 매런이 가진 서로 다른 동물적 감각을 거뜬히 현현하면서 <본즈 앤 올>의 ‘사랑의 세계’를 완결한다.
 

  호러 : 식인이라는 추한 악행
  하위 장르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카니발리즘 소재는 잔혹한 이미지를 동반한다. 포식자들은 바닥에 누워 버둥거리는 희생자의 팔다리며 몸통을 깨물고, 배우들의 얼굴은 피범벅이 된다. 잠시 뒤면 파리가 나는 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본즈 앤 올>이 묘사하는 이 ‘이터(eater)’들은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1991)>속 한니발 렉터처럼 사이코패스 성향을 가진 존재나 물리적인 힘으로 타인을 제압하는 포식자가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죽일 수밖에 없는 저주에 걸린 사람들에 가깝다. 이 본능은 유전되고, 주인공인 매런은 자신을 괴롭혀온 이 저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길을 나선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정신병원에 갇혀 반쯤 미쳐버린 엄마는 ‘사랑의 세계에 우리는 존재하면 안 된다’며, 직접 매런을 죽여주겠노라고 한다. <본즈 앤 올>이 가진 공포 중 하나는 바로 이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필요에 의해서 살을 가르고 장기를 파헤쳐야 하는 저주, 그래서 자신에게는 사랑이 허락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매런의 두려움이 이미지 아래에 깔려 있다.

  그런가 하면 표면적이고 실질적인 공포도 있다. 물론 솟구치는 피로 점철된 고어 이미지도 무섭지만, 매런이 홀로 걸어서 이동할 때의 긴장감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매런은 목놓아 울거나 무력감을 느끼기보다는 겉으로 보기에 꽤나 무던하게, 태연하게 세상을 살아나간다. 목소리는 크지 않지만 하고 싶은 말과 던지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하고야 만다. 어디든 앉을 곳을 찾으면 무심히 책을 꺼내 든다. 그러나 매런이 고속버스에서 내려아무도 없는 거리 위에 서면 두려움이 엄습한다. 아니나 다를까 낯선 남자가 매런에게 접근한다. 조언이 절실한 매런은 그를 따라가면서도 조용히 돌멩이를 주워 주머니에 넣는다. 텅 빈 밤거리에 배낭을 맨 채 홀로 된 여성 주인공, 영화 내내 조용히 따라붙는 스토킹이 불러오는 긴장감은 어떤 관객에게는 영화 체험을 넘어 개인적 경험의 반영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영화는 매런과 리 이외의 다른 ‘이터’들을 보여주면서 살생을 즐기는 자, 그를 추종하는 사람, 그리고 살인에 대해 자신만의 철학과 루틴을 가진 사람들과 주인공을 만나게 한다. 이들에게 식인은 우월함이거나 운명이다. 그들은 타인을 해치는 이 본능을 저주나 불행이 아니라 낭만으로 만들기에 무서운 존재이다. <본즈 앤 올>은 이렇게 미묘하고 때로는 불쾌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호러적인 감상을 이끌어낸다.


  로맨스 : 소멸로써 탄생하는 사랑
전형적인 호러 영화와 ‘사랑’이라는 감정은 멀리 있지 않다. 한국의 수많은 양산형 호러 영화는 그 정도가 지나쳐 결국 신파로 끝나기 십상이다. 할리우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제임스 완 감독의 <컨저링>, <인시디어스>와 같이 공포 체험을 극대화한 작품조차 가족간의 사랑과 유대를 악령을 물리치는 궁극의 무기로 만든다. 그러나 <본즈 앤 올>이 해낸 장르의 결합은 단순히 사랑의 힘을 극대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경계에서 비롯된 탐색은 일순간 사랑에 빠진 눈빛으로 바뀐다. 살육 이미지는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식사로, 또 갈등에 불을 붙이는 매개체로 기능하고 마지막으로는 이별과 성장으로 나아간다. 무시무시한 이미지와 아름다운 풍경을 오가면서 펼쳐지는 로맨스는 어쩌면 이질적으로 다가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장르영화의 전형성을 반복하지 않았다. 되려 식인이라는, 억누를 수 없는 섬뜩한 본능을 퀴어성에 대한 이야기로 변환해 해석하게 될 만큼 특수한 정체성처럼 다룬다. 그렇기에 리와 매런의 사랑은 호러 영화 속 철없는 커플이 아니라 과거를 고백하고 신념에 관한 갈등을 겪는, 점점 힘이 커지는 로맨스로 거듭난다.

  매런과 리의 로맨스는 장르의 결합에서 오는 특별함뿐만 아니라 동시대 관객에게 어필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관계에는 우열이 없기 때문이다. 매런은 첫번째로 만난, 늙고 어딘가 수상한 이터에게서 냄새 맡는 법과 ‘다른 이터는 먹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터득한다. 그 두 요소를 통해 그는 리를 발견하고 또 감화된다. 그리고 숲속에서 만난 이터와 그의 친구를 통해 사람을 뼈까지 모조리 먹어치우는 최종적인 단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매런은 지금껏 터득한 것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리를 해방시켜주기에 이른다. 즉 <본즈 앤 올>은 소녀가 가르침을 받아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고 다른 존재를 발견한 뒤, 그가 해방되도록 돕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매런의 여정뿐 아니라 리의 캐릭터 또한 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는 영화의 배경인 80년대의 미디어 속 전형적인 백인 남성으로 보이지 않는다. 매런을 끌어당긴 요소는 그가 착한(nice)사람이 되고 싶어한다는 것, 예술을 좋아할 줄 안다는 것, 매런을 구속하지 않고 기다릴 줄 안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기분을 멋대로 묘사하는 순간에 매런은 그를 단칼에 거절한다. 이야기의 촘촘함이 잠시 무너질지언정, 그들은 그런 식으로 권력이 개입할 틈 없는 관계를 유지한다. 영화는 설리와 리, 즉 시신이 두 구나 남았을 집이 새 것처럼 말끔한 것을 보여준 후에, 리가 과거를 고백했던 평원에서 서로를 끌어안은 두 사람의 이미지로 막을 내린다. 결국 두 사람은 어딘가에 편입하거나 도망자 신세가 될 필요 없이 하나가 되는 엔딩을 맞는 것이다. ‘하나가 되는 엔딩’은 곧 매런이리, 즉 자신의 여행과 사냥에 동반한 연인을 뼈째 집어삼켰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Bonnie and Clyde, 1967)>의 범죄자 커플처럼 벼랑 끝에 몰려 마지막을 함께하는 낭만적인 공허를 선택하지 않았다. 매런과 리는 자신들을 억압하는 세상에 맞서거나 쾌락을 추구하는 도망자 신세가 되지 않는다. 이 커플은 자신들이 만든 사랑의 세게와 선善을 추구하려는 발버둥 끝에 하나가 된다. 그래서 <본즈 앤 올>은 아름답기만 한 관계가 아닌, 소멸로써 완성되는 사랑과 성장을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많은 관객들은 아마도 이미 스타 배우인 티모시 샬라메가 끔찍하게 죽어가는 이미지로 이미지, 사건의 연보를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 이야기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카 구아다니노가 이 젊은 배우들과 함께 재현해낸 세계는 소셜 미디어와 코로나의 시대를 살아온 관객들에 익숙한 직설적이고 극단적인 서사 구조의 편리성을 취하지 않는다. 편안한 엔딩 대신 살인 행위와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모순, 즉 추상적인 욕망을 이미지로 구현한 작품이기에 <본즈 앤 올>은 영화로서의 매력을 획득한다.


  루카 구아다니노의 인장
  구아다니노 감독의 작품을 한 편이라도 본 관객은 그가 공간 연출에 무심한 제작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아이 엠 러브(Io sono l'amore, 2009)> 속 부유한 가족의 대저택,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십대 소년의 방은 물론 <서스페리아>의 독일 전위적인 현대미술단 연습실까지 구아다니노는 배우가 누비는 모든 공간을 세심히 연출했다. 디테일과 더불어 꿈을 표현하는 몽타주의 연속, 소수자성의 존재, 미국을 바라보는 이탈리아 감독의 시선은 충분히 그만의 인장으로서 <본즈 앤 올>의 화면 안에 존재한다.

  매런과 리의 자동차 여행이 계속되는 이야기임에도 미술은 빛을 발한다. 감독 자신이 경험한 80년대의 흔적은, ‘30년은 약에 절어 산 냄새’가 나는 희생자의 집과 사용 흔적이 남은 두 사람의 물건들에서 드러난다. 록 밴드 키스(KISS)의 레코드판과 조악한 포르노그래피, 매런이 동시대 작품 속 최신 아이폰 대신 손에 쥔 워크맨이 그렇다. 또 인스타그램 없던 시대에 벌어진 소녀들의 파티로 가면 유리로 된 커피 테이블 위에 립스틱이며 매니큐어, 무언가 먹다 남은 부스러기가 있다. 매런과 리의 침대 옆 협탁에는 립밤, 뜯어진 콘돔 포장지, 설거지를 미룬 듯 놓인 물컵이 조용히 배우들을 돕는다. 그런가 하면 현실의 커플들이 그렇듯 두 배우의 옷을 바꿔 입히기도 하면서 인물 사이의 편안한 무드를 조절하기도 한다.

  한편 <본즈 앤 올>이 미국의 외곽 지역을 오간다는 점은 루카 구아다니노가 전작인 드라마 <위 아 후 위아(We are who We are, 2020)>에서는 미군기지라는 작은 미국 사회, 그리고 그 다양성을 이탈리아에 집어넣었던 것의 연장선처럼 보이기도 한다. 식인을 향한 본능을 퀴어성으로 치환하면 ‘사랑의 세계에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엄마의 말은 추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정상성만을 표방하는 사회를 가리킨다. 설리의 대사, ‘나이가 들수록 허기도 더 심해질 거야’라는 말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점을 시사한다. 폭력에 도취되었던 무서운 이터들은 소수자성을 부정하다 못해 반대로 마초이즘에 집착하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그래서 이번엔 섬처럼 좁은 미국이 아닌, 끝없이 넓은 미국 땅을 배회하는 인물들이 오랫동안 자신들의 존재조차 부정당했던 성소수자들처럼 보인다.

  <본즈 앤 올>은 전설이나 괴담인 줄로만 알았던 식인종, 즉 가시화된 적 없던 존재들을 창조했다. 매런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사랑을 선택하러 돌아온다. 그리고 마침내 이야기를 완결한다. <본즈 앤 올>은 소녀가 집을 나와 혼자가 되고 결국 모든 걸 잃는 비극이 아니라 끝내 완성되고야 마는 사랑과 그 피의 향연이다. 해피엔딩인지 새드엔딩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제47회 학술문예상 평론 가작 수상소감>

  오직 작품을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써낸 부족한 글에도 상을 받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 큽니다. 글이 아닌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하는 영화평론으로 학술문예상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하기만 한 도전으로 여겼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 정말 놀랐고, 또 기쁘기도 합니다.

  영화는 말이 없는 예술입니다. 물성도 없어서 오직 기억에 의지해 집까지 데려와야 하는 예술입니다. 또박또박 설명하는 대신 연출로 분위기와 감정, 주제의식까지 전달하는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고 읽는 것은 묘사를 통해 이미지를 더듬어 보는 멋진 경험입니다. 그러나 묘사와 논리를 넘나들면서 작품을 해체하고 또 변호하기도 해야 하는 평론은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사람만이 써낼 수 있는 글이라고 저는 여겨 왔습니다. 이미 상영관에서 매 순간 매혹당했던 많은 관객들에겐 평론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으리라는 생각도 원동력을 앗아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엄청난 양의 묘사와 해부에 ‘가작’이라는 과분한 칭호가 붙었다는 사실이 제겐 큰 동기부여입니다. 게다가 <본즈 앤 올>은 큰 명성과 사랑을 얻지는 못한 작품이기에, 오직 그 아름다움과 그로테스크의 교차를 변호하고자 하는 낯선 글에 지면을 주신 것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기에, 앞으로도 저는 영화가 주는 수많은 이미지와 감정에 언어를 부여하는 글을 써 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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