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의 라이따이한, 그들은 누구인가?
베트남의 라이따이한, 그들은 누구인가?
  • 조흥국 부산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 승인 2017.12.04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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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을 더 잘 이해해야 해
  동남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베트남만큼 한국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없다. 고려 시대인 1220년대 중엽에 베트남어로는 ‘리롱뜨엉’, 한자로는 이용상(李龍祥)이라는 이름의 한 베트남 왕자가 내란을 피해 고려에 망명해 오늘날 화산(花山) 이(李)씨의 조상이 됐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지봉(芝峰) 이수광(李睟光)의 글이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사이 베트남 지식인들에게 꽤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두 나라가 모두 유교 및 한자 문화권에 속해 있었기에 그러한 만남이 가능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두 나라는 베트남전쟁을 통해 매우 복잡한 관계로 얽히게 된다. 그 관계의 한쪽에는 한국 군인들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해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의 민간인을 학살했던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라이따이한 문제가 놓여 있다. ‘라이따이한’이란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한국인 남성과 베트남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사람을 가리킨다. ‘경멸적인 혼혈’ 혹은 ‘잡종’을 뜻하는 ‘라이(lai)’와 전쟁 당시 베트남에서 대한민국에 대한 명칭으로 통하던 ‘다이한(Dai Han)’의 합성어인 ‘라이따이한’은 간단히 ‘한국계 혼혈아’로 번역될 수 있다.

  라이따이한 문제는 한국인 남성들이 베트남전쟁 기간, 그리고 특히 1975년 베트남의 공산화 후 베트남인 ‘아내’와 자식을 버리고 한국으로 귀국한 것에서 시작된다.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한국인 군인과 민간인은 모두 약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한국인 군인들과 민간인 기술자들은 주로 호찌민, 다낭, 꾸이년, 냐짱 등 베트남 중부 이남의 주요 전략 요지들에서 주둔하고 생활했다. 그곳에서 그들 중 일부는 베트남 현지인 여성과 결혼하거나 동거했다. 동거하던 베트남인 여성과 자식을 버리고 귀국하는 한국인 남성의 모습은 당시 베트남 특파원으로 활동한 동아일보의 이연교 기자가 1980년에 출판한 ‘네가 기자냐’라는 책에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

또 어떤 기술자는 어느 꽁가이(아가씨)와 방을 얻어 살림을 차리고 임신까지 시켰다. 점점 불러가는 그 아가씨의 배에 눈길이 미칠 적마다 그 걱정이 태산같이 쌓였던가 보다. 월남에 그대로 붙잡혀 주저앉게 되지 않나... 갖가지 궁리 끝에 그는 여인 몰래 귀국해 버리고 말았다.

  한국인 개개인들의 이러한 무책임한 행동에 대해 한국 정부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에 비해 미국 정부와 미국 사회는 자국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베트남 ‘가족’을 미국으로 데려오기 위해 애썼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 간 수교 이후에도 라이따이한은 한국 사회의 관심 밖에 있었다. 라이따이한 문제는 1994년 초에 기술연수생으로 온 찐티넛이란 라이따이한 1세가 낡은 사진 다섯 장을 갖고와 경찰의 도움으로 한국인 ‘아버지’와 극적으로 상봉하면서부터 이슈화되기 시작했다.
<출처/MBC 뉴스>
<출처/SBS 스페셜>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1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는 라이따이한들은 1975년 전쟁 종식 이후 베트남 사회에서 ‘적군의 자식’으로 따돌림을 받으며 살아왔다. 외모에서도 종종 베트남인과 구별되는 1세대 라이따이한은 지난 40년 동안 베트남 사회에서 겉돌며 사회적·경제적 차별을 받아왔고, 최근까지 베트남 사회로 통합 및 동화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대부분 베트남인 홀어머니와 함께 가난하게 살면서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그들은 사회에서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 못한 채 대개 힘든 노동이 요구되거나 멸시받는 직업에 종사해 왔다. 그래서 많은 라이따이한이 시클로(자전거 인력거) 운전, 자전거 수리, 봉제 공장의 재봉, 식당 종업원, 노점상 등으로 생계를 유지해 왔다. 또 경제적으로 취약하다 보니 적당한 배우자를 찾지 못해 결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하지만 라이따이한들 중에는 일찍부터 한국어를 배워, 베트남에진출한 한국계 회사에 취업해 ‘성공적으로’ 사는 사람도 있었다. 또 양국 수교 후 한국인 ‘남편’ 혹은 ‘아버지’가 베트남에 돌아가 ‘아내’와 ‘자식’을 찾아 베트남인 가족을 부양하거나 혹은 한국에 돌아와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다행스러운 경우도 있었다.

  수교 이후 양국 간 경제적 및 인적 교류가 증대되면서 ‘신(新) 라이따이한’이 생겨났다. 사업상 베트남에 장기적으로 가 있는 한국인 남성들과 현지처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2세들이 그들이다. 문제는 한국인들이 베트남에서 철수할 때 현지처와 자식을 종종 버리고 온다는 것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 보여준 한국인 남성들의 모습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따이한, 특히 2세대 라이따이한의 생계와 베트남 사회에서의 적응을 돕기 위해 한국의 여러 민간단체가 다양한 교육 및 직업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예컨대 라이따이한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자선단체인 ‘한베따이한’은 2017년 11월, 호찌민에서 베트남 당국과 ‘산업대학’ 설립을 위한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라이따이한들과 베트남인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구상된 산업대학은 3년 고등학교 과정과 2년 전문대 과정을 둬 자동차, IT 등의 기술과 태권도 등의 무술을 가르치고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며 빈곤한 학생들에게는 무상교육의 혜택을 제공할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라이따이한들은 한국에서의 취업에 대한 보다 밝은 전망을 갖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의 ODA(공적개발원조)는 아시아 특히 동남아시아에 집중돼 있으며,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베트남이 가장 많은 원조를 받고 있다. 베트남이 대한민국의 해외 원조 사업에서 중시된다는 측면은 무상원조 액수가 베트남의 경우, 2006년에 약 75억 원이었던 것이 2010년에는 323억 원으로 약 다섯 배 증가했다는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2015년 베트남은 한국 ODA의 14.8%를 받아 2위인 라오스의 6%와 2배 이상의 격차를 둔 최대 수원국이었다. 라이따이한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정부의 베트남에 대한 개발원조는 라이따이한에 대한 베트남 사회의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될 것이다.

  최근 한류의 영향과 양국 간 다양한 형태의 인적 교류로 인해 베트남에서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많이 나아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봉제 공장들에서의 베트남인 근로자들의 파업 등 베트남에 진출한 한인 기업들에서 가끔씩 불거지는 노사 분쟁과 베트남인 결혼이주 여성들이 한국 사회에서 종종 겪는 갈등, 한국인 관광객들이 베트남에서 간혹 저지르는 추한 행태 등 우리나라가 베트남인에게 좋지 않게 비칠 가능성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라이따이한 문제는 직접적으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의 해결 방안이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베트남을 보다 잘 이해하고 베트남 사회와 문화에 대해 보다 진솔한 자세로 다가가야 하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베트남에서 보다 긍정적으로 바뀔 때 비로소 라이따이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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