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간 대기업을 상대로 제품에 결함이 있는 것처럼 꾸며 2억 원 이상의 보상금을 뜯어낸 악질 블랙컨슈머가 붙잡혔다. 얼마 전에는 68건의 허위신고를 해 전자업체를 상대로 약 8천만 원을 뜯어낸 블랙컨슈머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렇듯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있는 블랙컨슈머. 고의적인 악성 민원으로 기업에 해를 끼칠 뿐 아니라 일반 소비자에게까지 악영향을 주고 있는 블랙컨슈머에 대해 알아보자.
10개 중 8개 기업 블랙컨슈머 경험해
최근 음식점에서 고의적으로 유리조각을 입에 넣고 씹은 뒤 일부러 상처를 내는 수법으로 영세 식당 상인들로부터 보상금을 챙긴 블랙컨슈머가 경찰에 붙잡혔다.
블랙컨슈머란 악성을 뜻하는 ‘블랙(black)’과 소비자란 뜻의 ‘컨슈머(consumer)’를 합친 신조어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기 위해 악성 민원을 고의적, 상습적으로 제기하는 소비자를 뜻한다. 지난 2008년 이후 일부 악성 소비자들이 식품에 고의적으로 이물질을 넣어 보상을 요구한 사례가 연이어 적발되면서 블랙컨슈머가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국내기업 314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의 83.4%가 보상을 목적으로 한 소비자의 악성 민원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블랙컨슈머 유형에는 환불, 반품 요구를 넘어 과도한 보상금을 원하는 유형, 고의적으로 상품에 하자를 가해 민원을 제기하는 유형, 기업의 이미지를 깎아 내리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유형 등이 있다. 일부 블랙컨슈머들은 민원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각 업체의 관계자에 대한 폭언이나 폭력, 심지어는 성희롱도 서슴지 않는다. 이전의 블랙컨슈머는 주로 식품, 전자 기기 업체를 상대로 악성 민원을 제기했으나 최근에는 통신업, 금융업 등 다양한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단순히 제품에 대한 민원에 그쳤던 기존의 블랙컨슈머와 다른 새로운 유형의 블랙컨슈머도 등장하고 있다. 신상품이 나올 때마다 백화점에서 의류를 구입하고 디자인을 ‘카피’한 뒤 환불을 요구한 일명 ‘카피녀’와 홈쇼핑의 1+1 추첨행사 진행시 이벤트에 당첨될 때까지 주문한 후 이벤트에 당첨된 1건을 제외한 나머지 주문을 모두 환불한 ‘추첨남’이 대표적인 예다. 이영애 인천대 소비자아동학과 교수(이하 이영애 교수)는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인해 정보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블랙컨슈머의 유형이 생겨나고 있다”고 현 상황을 분석했다.
이미지 훼손 우려에 기업은 미비한 대응만
블랙컨슈머 논란은 예전부터 있어왔지만 블랙컨슈머와 일반 소비자의 구별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법적 처벌이 어려운 실정이다. L 의류업체 직원 김은혜씨는 “무리하게 환불이나 교환을 요구하는 손님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오지만 그런 고객들을 블랙컨슈머로 단정지을 수 없어 요구를 모두 들어주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기업에서는 악성 민원 유형에 대한 대처방안을 만들어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블랙컨슈머에 의한 피해 사례는 매년 증가하는 실정이다. 이영애 교수는 “일부 소비자들이 악성 민원을 제기해 자신이 원하는 보상을 받게 되면 일종의 학습 효과를 경험하게 되는 것도 블랙컨슈머 증가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극단적인 블랙컨슈머 사례를 반복해서 접하며 ‘나 정도의 요구나 보상은 아무것도 아니구나’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기준점 설정도 블랙컨슈머 양산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기업들은 블랙컨슈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일부 블랙컨슈머는 사회적인 파장을 강조하며 언론 또는 인터넷에 관련 사실을 유포하겠다고 기업을 협박하기도 한다. 이에 기업들은 블랙컨슈머의 악행에도 불구하고 제품과 기업의 이미지 손상을 우려해 블랙컨슈머의 요구를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대기업들이 악성 민원 유형을 분석해 대응 시스템을 구축하고 블랙컨슈머를 법적으로 처벌하는 등 적극적인 대처에 나서자 블랙컨슈머들은 비교적 대응 방안이 미비한 중소기업을 집중 공격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은 중소기업은 온라인상의 부정적인 글 하나에도 큰 타격을 입을 수 있어 블랙컨슈머의 협박에 더 취약하다. 대한상공회의소가 블랙컨슈머의 부당한 요구를 경험한 중소기업 203곳을 대상으로 ‘블랙컨슈머 대응 실태’를 조사한 결과 83.7%가 악성 민원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답했다. 이 중 90%는 기업 이미지 훼손을 우려해 피해가 늘어도 악성 민원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이하 이승신 교수)는 “중소기업들이 블랙컨슈머의 행동 유형에 따른 대응책을 마련해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중소기업들이 취해야 할 자세를 설명했다.
기업 넘어 일반 소비자에게까지 피해 줘
블랙컨슈머 저지할 대책 필요
블랙컨슈머들의 수법은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최근 블랙컨슈머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수법을 공유하고 조직을 이뤄 지속적으로 상품을 훼손, 막대한 보상금을 요구하거나 집단 민원을 보내는 방식으로 기업을 압박한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기업뿐 아니라 일반 소비자들에게까지 피해를 끼친다는 점이다. 블랙컨슈머의 악행이 반복되다 보면 기업이 소비자의 정당한 지적에도 예민하게 반응해 결국 정당한 의견을 표출하는 소비자들이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승신 교수는 “블랙컨슈머로 인한 금전적인 손해비용은 다시 원가에 반영돼 전체 소비자에게 전가된다”며 “소수의 블랙컨슈머들 때문에 다수의 선량한 소비자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블랙컨슈머 문제를 근절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우나 블랙컨슈머를 저지할 최소한의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영애 교수는 “기업은 해당 직원들이 능동적으로 블랙컨슈머에 대처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하고 장치를 마련해 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블랙컨슈머의 주요 원인은 소비자의 역할과 책임에 대한 의식 결여다”며 “무엇보다 소비자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인식하도록 하는 소비자 교육이 확대돼야 한다”고 강조했다.